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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코 Apr 01. 2024

"좋아함과 잘함과 계속함으로" 박종진의 멈추지 않은 삶

르코의 아모브레터, 여섯 번째

작대기 애착에서 만년필 집착까지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87분, 하지만 3분은 반드시 올 것
계속함은 좋아함의 궤도를 따르기 마련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잘함으로 나타나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오늘


"베로, 당신은 왜 그림을 그려?" 
"어린아이는 누구나 그림을 그려, 단지 너는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을 뿐이야." 


영화 대사 같은 이 문답은 배우 류승범 씨와 슬로바키아 출신 화가인 그의 아내가 나눈 현실 속 대화다. 우리는 쉼 없이 달리기만 해서 '언제 멈춰야 하나, 멈출 수는 있을까'를 반복하며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그녀는 외려 "너는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라고 하니 맥이 탁 풀린다. 우문하게 만드는 현답에 정신이 다 아득하다.  

우리는 '어른'과 '순수함'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두지 않는다. 순수한 어른은 세월의 때를 입고 모순이 되어버렸지만 간혹 순도 높은 어른을 발견하면 깊숙이 넣어둔 순수함을 꺼내 내적 공감을 느낀다.   


여기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어른 아이가 있다. 이 사람과 공감에 이르기 위해서는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눈살을 찌푸려야 할 때도 있고 내가 살아온 세상 이치로는 계산이 안 되는 초능력에 혀를 내 두르며 자기부정의 과정도 거쳐야 한다. <박종진만년필연구소> 박종진 소장의 이야기다. 


두 살 때부터 그의 왼손에는 늘 작대기가 있었다. 작대기가 꺾이거나 휘면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못하다가 곧은 것을 쥐어주면 얼음 땡 하듯 움직일 수 있었단다. '곧고 대칭인' 만물에 대한 집착이 중학생 때 아버지의 만년필을 보자 그리 옮겨 갔고, 그때부터 그의 우주적 신경이 만년필 하나에 꽂힌다.  


만년필을 위해 문방사우까지 혹독하게 공부하다 보니 필기구 세계를 섭렵, 을지문덕(을지로 문구 덕후)이라 불린다. 조선왕조실록을 뒤져서라도 연원을 찾아내고 가족이 잠든 새벽에 몰래 화장실 욕조에서 닥종이를 만든다. 만들어봐야 이해할 수 있다며. 역사, 문학, 철학, 과학, 경제 등 그가 만년필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다 쓰는 지식의 범위는 끝이 없다. 아니 끝낼 생각이 없다.  


"지구에 있는 만년필은 다 제 거예요. 고장 나면 다 저한테 오게 되어 있거든요."  


지구 만년필 방위대를 자처하는 그는 만년필을 40년간 무료로 수리해 왔다. 왜 무료인가 물으니 '좋아하니까요'라고 단촐하게 답한다. 3평 단촐한 을지로의 연구실에 방망이 깎듯 웅크리고 앉아서 수리한 만년필이 2만 자루가 넘는다. 주인이 누구든 가격이 얼마든 똑같은 마음으로 수리하니 전 세계에서 오지 않는 만년필이 없다. '좋아서 한다'는 그의 말에 반쯤은 남겨두었던 의심을 거둔다. 그에게 만년필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의 상대다. 

박종진 소장과 그의 을지로 연구소 풍경_[출처]월말 김어준

비범하기 이를 데 없다. 15배 확대경으로 봐도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갈라짐을 만년필을 건네받기도 전에 알아채고, 비 내린 뒤의 운동장을 뛰는 듯한 필감이면 좋겠다는 말에 그 자리에서 펜촉을 쓱쓱 만져 감수성 충만한 의뢰인을 만족시킨다. 수년 전 수리한 만년필이 돌고 돌아 다시 자신을 찾아왔을 때를 회상하며 말하길, 1만 자루 정도는 펜촉의 모양을 기억한단다. 인간의 능력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맞는가. 


길 가다 넘어져도 만년필이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특수한 낙하법을 개발하고, 3년 전 약수터에서 물 한 바가지 떠준 게 다인 할아버지를 길 가다 우연히 마주쳐도 반갑게 인사하는 이 사람, 다른 물리 법칙의 세상에 사는 걸까. 양자역학을 대중에게 설명하던 어느 물리학자가 그랬다.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세간의 실로는 좀처럼 꿰어지지 않는 그의 삶, 철없음이라는 단죄를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멈추지 않은 삶은 숭고함이나 무모함이 아니라 단지 계속함이라는 사실. 


축구 선수가 90분간 이어지는 한 경기에서 볼을 터치하는 시간은 단 3분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우리가 본 축구라는 스포츠는 22명의 3분을 번갈아 비춘 스포트 라이트였다. 


독점되었던 카메라의 권력이 우리의 손에 넘어왔다. 유튜브, 팟캐스트 등의 뉴미디어는 배제되어 있던 개인의 87분을 비춘다. 레거시 미디어조차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 유퀴즈의 흥행이 말한다.  


팟캐스트 <월말 김어준>을 통해 박종진 소장을 접했다. 2021년 12월 처음 방송에 나와 경계심을 풀지 않고 뚝딱거리던 그는, 이내 꼭 맞는 종이를 만난 듯 일필휘지로 19편의 에피소드를 써내려 갔다. 그는 몇번이나 "어휴, 알아주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무도 비추지 않았던 시간의 고단함을 웃으며 털어 내는 모습에 괜히 내가 다 미안하다. 영향력 있는 미디어의 맛도 봤다. 연구소를 큰 곳으로 옮겼고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만년필 출시도 앞두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 잘하는 일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우리에게 박종진 소장의 멈추지 않은 삶은 말한다. 그냥 계속하라고. 계속함은 좋아함의 궤도를 따르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잘함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할 일은, 좋아함과 잘함과 계속함을 지지대 삼아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 아닐까.   


*레터를 운영 중입니다. 더 많은 글은 아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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