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나는 내가 망가진 것을 알았다

by 유이배


그 날은 유독 더 마음이 지쳐있었다.


복직 후 팀장으로 승진을 하게 된 나였지만 내 입장에서 그 승진은 무의미하고 스트레스만 가중된 것이었다. 출산휴가 동안 사수 선배가 해고되었고 나의 복귀와 함께 팀 전체가 자회사로 보내지게 됐다.


그렇지만 그 시절 아둔했던 내 마음 한편에 실낱 같은 기대가 있기도 했다. 남성적이고 보수적인 본사에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과 듣지 않아도 될 말들로 상처를 숱하게 받았기에 상대적으로 젊은 자회사에 가면 좀 더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그러나 막상 자회사로 복직을 해보니 그런 기대는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첫날부터 온갖 기싸움을 걸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지쳤다. 인사담당 B는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쯤 많은 30대 남자였다. 그는 우리 팀 후배들을 자회사로 옮기는 실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대장 노릇을 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팀장으로 복귀하자 나를 짓눌러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쓸데없는 트집을 잡아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는 내게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수년 째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같이 일해왔고 그저 소속만 바뀔 뿐인 사람에게 웬 자기소개서? 살짝 화가 나기도 했지만,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이겠거니 싶어 한 줄 정도의 자기소개서를 써서 책상에 놓고 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직접 수기로 써주시는 수고를 해주신 것은 참 감사하지만 출력해서 내달라"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웃음과 함께 능글거렸다.


"이 자기소개서가 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제가 지금 이 자기소개서 때문에 다른 급한 업무를 처리 못해야 합니까?"라고 말하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이렇게 하는 것이 원칙이라느니,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했다느니 하는 말을 중언부언하는 그의 입을 "제가 대표님이랑 이 건에 대해 직접 상의할게요"라는 말로 막아버렸다. 몇 시간 뒤 그는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라며 꼬리를 내렸다.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대체 왜 사람들은 하등 쓸데없는 것으로 누군가의 기를 누르는 것에 그렇게 열심일까. 회사에서 만났으면 그냥 일만 하면 안 되는 것일까.


회사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일'보다는 그들의 관계 안에서 우위를 점하는 '정치'에 더 열성적이다. 그것이 그들의 일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인지, 경험을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고 지치기만 할 뿐이었다.


B와의 일은 일단락이 되었고, 그 뒤로 그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회사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너에 대한 충성도가 절대적인 회사에서 더더구나 노조까지 없는 자회사는 쉴 새 없는 조직개편을 반복해댔다. 내가 복귀하고도 대체 몇 번의 조직개편이 있었던 것인지, 의미도 없는 팀의 명칭은 대체 몇 번이나 바뀐 것인지 모르겠다. 수없이 반복되는 조직개편이다 보니 그 속의 승진은 더더욱 허망해 보였다. 장 자리를 하나 달고 시시덕거리다가도 불과 몇 달 뒤엔 다시 주저앉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나 그 와중에도 누군가의 기를 누르고 짓밟아 보겠다는 열성적인 이들은 매번 존재했다.


그 열정적인 인물들과 하루하루 어리석은 기싸움을 하던 것이 그 당시 나의 삶이었다. 그즈음 나는 더 미룰 것도 없이 나를 지키기 위해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했다. 퇴근길에 눈에 띈 요가센터 간판을 보고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 등록을 하고 바로 매트에 섰다. 그저 닥치는 대로 하루하루 나 자신을 추스르고자 애를 쓰며 살았고, 가끔 마시던 낮맥으로도 도저히 치유가 되지 않던 날 다시 요가 매트 위에 올라 영혼의 평안함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날, 넉넉한 표정의 요가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당신의 마음, 괜찮은가요?


수업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던진 그 질문에 나는 울컥거렸다. 결국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터져버린 눈물을 느끼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안에는 분노와 설움이 뒤엉켜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꾸역꾸역 눌러대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의 일상적인 다정함에도 마음이 출렁거릴 만큼, 나는 망가져 있었다.


아마도 그날 매트 위에서 나를 추스르고 가다듬으며 나는 결심했던 것 같다.


여기까지 버틴 것만도 충분하다. 더 이상 나를 망가뜨리지 말자.




글. Sophia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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