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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pr 18. 2024

일본어 찌꺼기

'법령이나 정관에 위반하거나'

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법이라는 법이 있다. 약칭 구조조정회사법으로 2000년 10월 23일 제정된 법이다. 재무상태가 악화되었으나 회생가능성이 있는 기업의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를 설립하고 이로써 기업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이 법을 만들었다 한다. 그런데 이 법 제18조는 제정 때부터 이렇게 돼 있었고 지금도 이렇다.


 제18조(감사의 직무) 

③감사는 이사가 직무수행과 관련하여 법령이나 정관 위반하거나 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에 대하여 현저하게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사실을 발견한 때에는 이를 이사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법령이나 정관 위반하거나'가 눈길을 끈다. '위반하다'는 타동사로서 목적어를 취하는 동사다. 그 목적어에는 조사 '을/를'이 붙어야 한다. 그런데 '법령이나 정관 위반하거나'라 했다. '법령이나 정관 위반하거나'라 했어야 한다. 우리는 '규칙 위반했다'고 하지 그 누구도 '규칙 위반했다'라고 하지는 않지 않나. 그런데 왜 법조문은 이런가.


2000년 10월에 제정된 법에 이런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민법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민법은 모든 법의 뿌리다. 1958년 2월에 제정된 민법에는 '~ 위반하다'와 같은 표현이 숱하게 나온다. 이는 일본어의 '~反する'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일본 법에서 조사 ''를 썼다고 무비판적으로 ' 위반하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요즘 만들어지는 우리나라 법률에는 '~ 위반하다'가 보이지 않는다. 죄다 '~을/를 위반하다'라 한다. '~ 위반하다'가 국어 문법에 맞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왜 민법의 숱한 '~ 위반하다'를 바로잡지 않는지, 그리고 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법 제18조도 그대로 두는지 모르겠다. 게을러서일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서일까. 말을 바로 해야 한다. 내년이면 광복 80주년인데 이게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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