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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Sohn Apr 05. 2024

아빠딸

아빠에게 쓰는 편지

"여보세요 ~"

"응, 그래! 아빠딸~"

언젠가부터ᆢ 내가 전화를 걸면, 아빠는 이렇게 답하시며 전화를 받으세요.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나에 대한 아빠의 사랑과 딸에 대한 자랑스러움의 표현으로 다가오며 울컥하곤 합니다.

그래, 난 아빠 딸이지ᆢ

아빠는 어린 시절 내게 너무 엄격하셔서 정직을 중시하며 윤리적으로 옳은 것만 강조하시고 때로는 무섭게 화를 내는 분이셨죠. 딸이 옳은 길로만 가길 바라셔서 그러셨겠지만 어린 내겐 얼마나 어려운 분이셨는지 엄마가 식사를 차려주시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겸상을 피하곤 했지요. 밥 먹다 혼날 것 같아서요. ~~

글쎄요. 사춘기 시절 아빠는 내게 그런 분이셨어요.

코로나19 가 시작되기 직전, 그러니까 2019년 말에 내가 30년 조직생활에서 벗어난 때가 아빠의 심장수술 시기와 겹쳐진 때였어요.

미국 애틀랜타에서 리더십 교육을 받고 귀국한 날, 남편은 내게 "내일이 아버지 수술이라고" 알려줬어요. 시차 적응도 안된 상황에서 너무 놀라서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라고 하니 아빠께서 내가 올 때까지 수술을 미루셨다고 합니다.

딸의 일이 아빠 수술보다 중요하셨나 봐요. 단순한 스텐트 시술이 아니라 개복수술이었고 계속 어지러워하시면서도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글로벌 리더들과 네트워킹하며 시간을 보냈던 거예요. 그렇게 매 순간 당신보다 딸을 우선으로 여기시는 부모님 덕분에 ᆢ지금의 내가 있는 걸 절감했어요..

수술의 위험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동의서에 사인을 하면서 아빠가 나를 기다리신 이유를 다시 느꼈고 중환자실에서 아찔했던 상황을 겪어내고 보니 지금은 그저 ᆢ감사만 남습니다.

당시에는 정말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대단한 글로벌 기관들에서 일을 해왔는데도 정작 아빠의 수술 시에는 나의 부족함과 약함만이 큰 아픔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남편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무사히 회복되셨고 난 직장을 그만두고 일 년 동안 파주에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아빠의 외래진료를 모시고 다니며 많은 대화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무섭고 강하던 아빠는 많이 약해지셨고 내게도 많이 유해지셨다는 걸 느꼈습니다.

어쩌면 아빠는ᆢ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딸을 키우거나 아빠 역할을 해보는 것이 처음이라 서툴렀던 건데, 난 그걸 내가 ᆢ아들을 낳아 키우며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은 서로 그렇게 조금씩 살아가며 알아갑니다.

코로나19 기간에, 나는 2년여간 5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자기계발 리더십 책뿐 아니라 공저와 번역서까지 출간하자 아빠는 "나는 딸이 작가가 되고 번역가도 되어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길 바랐었는데ᆢ 참 잘되었구나!"라고 하시며 내 책을 주변 지인들과 친척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셨어요. 지난 30년간 국제기구, 국제개발협력단체, 미국대학, 과학기술단체 등에서 일 해오면서도 한 번도 내 일에 대해 제대로 설명드릴 기회도 없었는데 이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너무 죄송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회복되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 맘을 읽으셨을까요ᆢ어느 날 외래를 모시고 다녀오는 길에 "아빠딸! 병원 오가며 그동안 평생해야 할 효도를 다했다"라는 말로 내게 고마움을 표현해 주시는데ᆢ 순간 눈물이 나더군요. 내가 그동안 아빠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었구나 ᆢ라고 깨닫습니다. 어쩌면 일을 열심히 했던 이유 중에는 아빠의 인정이 큰 부분이었음을 다시 알게 되었지요. 사실 나는 부모님께 대단히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나 봐요. 아빠는 내가 당신의 큰딸로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존재 자체로 나를 인정하셨던 건대ᆢ다만 사랑의 표현에 서툴러서 혹은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해 내게 전하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내가 식물을 제대로 키울 줄 몰라서 선물 받은 화초와 난은 아빠 집에 보내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꽃을 이쁘게 피우도록 정성을 다해 베란다에 살려 놓으십니다. 딸이 가져온 식물이 죽지 않게 정성스레 키우시는 것은 딸을 위한 기도마저도 포함하신 듯했습니다.

아빠가 지금 시대에 태어나셨더라면 아티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를 위해 서점 세 개를 운영하시느라 못했던 취미생활을, 서울 집을 팔고 파주로 가셔서 노년에 집을 짓고 나서야 시작하게 되셨죠. 젊은 시절에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도 많으셨을 텐데 딸 둘 잘 키우시려고 희생하고 애쓴 모습들이 이제야 보입니다. 수술받기 전에는 아코디언 연주로 즐겁게 연주 활동도 하셨는데 이제는 무거워 들거나 이동하기도 버거워하시니 마음이 짠합니다. 그래도 피아노와 기타 등 악기연주를 하시고 가족 생일 때마다 연주한 곡을 핸드폰에 저장해 틀어주시기도 하는데 우리는 쑥스러워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곤 하지요. 82세의 연세에도 핸섬하고 젠틀하고 호기심 가득하세요. 무엇보다도 걷기뿐 아니라 가까운 산에 등산을 꾸준히 하시고 집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하시며 쉬지 않고 체력관리를 하시는 모습도 배워야겠어요. 자식들이 힘들지 않게 하려고 건강 유지에 애쓰신다는 걸 나이 들어보니 저도 알겠습니다.

요즘도 마리를 안고 댁에 방문하면 웰컴드림크를 주시며 반겨주시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지나고 보니 알겠습니다 ᆢ하나님이 내게 가장 맞춤형으로 엄하고도 정 많은 아빠를 선물로 주셨네요ᆢ

"아빠! (50여 년 전이면 주위의 눈도 있고 그러기 힘드셨을 텐데^^) 첫 딸이 너무 이쁘다고 이불 포대기로 업고 산책도 다니셨다니 고맙습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 담아 키우셨기에 그 딸은 바르게 길을 걸어왔고 그 사랑 나누며 살고 있어요.

때론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아빠딸"이어서 행복합니다.

God bless you..

진심 담아 큰 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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