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 시작
"우리는 나이가 들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진정한 내가 되어가는 것이다."
— 린 홀 (Lynn Hall)
겉늙으면 나이 들어서 오히려 좋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니 동기들 대부분이 결혼을 했다. 몇 남지 않은 미혼 그룹에 속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졸업 후에도 여러 학회 강의를 들으며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저녁에 모여 스터디를 하곤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영도까지 가서 학회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서로의 몸에 직접 실습을 하기도 했다. 집 방향이 같은 친구들과 버스 뒷좌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귀가하곤 했다.
친한 두 친구가 연애 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없다고 대답했는데, 두 친구가 갑자기 내 얼굴을 보더니 "너 30대 중반으로 보인다"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당시 나는 20대 후반이었고, 그전부터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기에 그 말 한마디에 기껏 키워가던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결혼 후, 아내의 적극적인 내조 덕분에 나중에는 "깔끔하고 옷 잘 입는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재 스타일의 헤어, 얼굴을 덮는 큰 안경, 그리고 권상우가 입어도 어울리지 않을 법한 옷차림이었지만, 이제는 댄디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바뀌었다. 아내를 따라 피부과에 다니면서 여드름 흉터로 울퉁불퉁했던 피부도 치료받았다.
40대 중후반 무렵에는 나이를 밝히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곤 했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점점 더 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첫아이 돌 사진을 보면 그때가 가장 나이 들어 보일 정도였다. '동안'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즐거웠고, 자주 어울리던 네 살 어린 후배도 넓어지는 이마 덕분에 나보다 더 형처럼 보이곤 했다. 그런 시간이 기분 좋았고, 내심 즐기기도 했다.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나이의 앞자리가 5로 바뀌면서, 나이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호르몬 변화 때문인지 흰머리가 서서히 올라오고, 외모적으로도 노화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더 이상 '동안'이라는 말을 듣기 어려워졌고, 50대로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대답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나이를 듣고 "우리 부모님과 비슷하시네요"라고 말할 때면 순간 얼굴이 붉어진다.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낀다.
'젊어 보이세요'라는 말도 이제는 기분 좋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고, 괜한 위로처럼 느껴진다. 마치 어르신들이 '정정해 보이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것처럼, '젊어 보인다'는 말이 이제 동안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이가 주는 허술함을 덜어주는 표현처럼 다가온다.
코로나 이전에는 외모에 꾸준히 신경을 썼다. 방송 출연, 인터뷰, 유튜브 촬영도 했고, 모임도 많았다. 피부에 좋은 주사도 맞고, 저녁에는 시트팩이라도 붙이곤 했다.
그러다 어느새 외모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졌다.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외모에 대한 관심도 멀어졌고, 마스크의 영향도 컸다. 코로나가 끝나고 마스크를 벗게 되자, "얼굴이 안 좋아 보이세요"라는 말까지 들었다. 마치 돌보지 않은 화단에 잡초가 무성해지듯, 나이에 따라 외모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다.
오랜만에 시트팩이라도 붙여볼까 하고 서랍을 열어보니,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팩들만 잔뜩 들어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늘어진 얼굴과 칙칙한 피부를 마주하기 싫었지만, 시트팩 하나 붙일 의지조차 사라져 있었다. 젊음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이 바로, 진정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