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 노안
"노안이 온다는 것은, 더 멀리 볼 줄 알게 되었다는 인생의 또 다른 선물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980년대 중학교 하교길, 전자오락실엔 갤러그가 있었다. ‘한 판만 하고 가자’던 다짐은 어느새 두 판이 되고, 30분이 1시간이 되었다.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 거리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가로등 불빛이 이상하게 흐릿하게 퍼져 보였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내 눈과 세상 사이엔 안경이 끼어들었다.
첫 번째 고장
국가고시 준비가 한창이던 여름, 친구들이 내 눈을 보고 물었다. “눈에 뭐가 났어?” 거울을 보니 눈꺼풀 밑이 붉게 부풀어 있었다. 붉은 덩어리가 점점 눈을 침범해가고 있었지만, 불편하지 않아 며칠 동안 그냥 두었다.
덩어리는 점점 커졌고, 마침 학교 앞 버스 정류장 근처에 안과가 있었다.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 조금 일찍 집을 나서 안과에 들렀다. 대기실은 따로 없이 복도의 벽면에 기다란 의자가 놓여 있었고, 요즘 병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 매표소처럼 유리 칸막이 틈새로 접수를 받고, 진료가 끝난 환자들에게 약도 내주었다. 진료실은 커다란 원룸처럼 되어 있었다.
차례가 되어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원장님 앞에 앉았다. 눈을 뒤집어 살피던 원장님은 "수술해야겠네요. 자라난 살을 잘라내야 해요."라며 옆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지금요? 수술을요?”
수술이라면 별도의 수술실로 이동해 가운을 갈아입고, 소독과 마취를 하면 의사와 간호사가 엄숙하게 진행해야 하는 거 아닌가? 뻥 뚫린 공간의 일반 침대에서 한다고? 보호자 동의는 필요 없나? 성인이니까 그렇다 쳐도 부모님께 전화는 해야 하지 않을까? 진료비가 수십만 원 나오면 어쩌지?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간호사가 얼른 누우라고 했다.
"금방 끝납니다. 보험 적용되니 진료비도 얼마 안 나와요."
수술은 몇 분 만에 끝났고, 안대를 하고 나왔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된 첫 번째 고장이었다.
두 번째 고장
결혼 후 첫째와 둘째가 태어나고 한참이 지나 아내가 말했다. "오른쪽 눈 안쪽에 뭐가 났어." 거울을 보니 눈 안쪽이 붉게 부어 있었고, 이미 눈의 1/4을 덮고 있었다.
근처에 새로 생긴 안과에 예약했다. 의사는 덩어리를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첫 번째 수술 덕분에 익숙해져서 별 고민 없이 침대에 누웠다. 수술은 금방 끝났고, 마치 편의점에 들렀다 오듯 안과를 다녀왔다.
세 번째 고장
“눈에 그게 뭐야?”
거울을 보니 눈 안쪽 눈물샘 근처가 여드름처럼 노랗게 부풀어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커졌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또 눈에? 짜증이 났다. 휴가를 앞두고 있었기에 병원은 휴가 다녀온 후에 가기로 했다.
휴가지 백화점에서 쇼핑 중, 눈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싶어 안경을 보니 좁쌀보다 큰 덩어리가 붙어 있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니 노란 덩어리는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안과를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노화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눈에 다양한 불편이 생겼다. 오후가 되면 눈이 뻑뻑해지고, 겨울에 찬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 운전 중 신호대기할 때는 눈앞에 기다란 분자 모형이 둥둥 떠다니는 걸 보기도 했다.
결정적인 건, 진료를 볼 때 검사지의 글씨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엔 눈썹을 찌푸리면 보였지만 이제는 찌푸려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안경을 살짝 들어 글씨를 확인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없어 보였다. 모니터를 보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세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안경 렌즈를 바꾸려고 10년째 다니던 안경점을 찾았다. 근시에 고도 난시에 노안까지 와서 일상의 불편함을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해답보다는 하소연에 가까웠다.
“다초점 렌즈를 하시면 됩니다.”
지하철 광고에서 보던 다초점 렌즈라니. 사장님은 지금 내 눈 상태에 딱 맞는 렌즈라며 추천했다. 눈의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증상이니 다초점 렌즈를 사용하면 세상이 달라 보일 거라고 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평소 쓰던 렌즈보다 5배 이상 비쌌다.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대안은 없었다. 아내와 잠시 의논한 후 신용카드를 꺼냈다.
일주일 후, 다초점 렌즈를 장착한 안경을 찾았다. 써보니 정말 다른 세상이 열렸다. 등산할 때 땅이 흐릿하지 않았고, 차 안의 계기판도 또렷하게 보였다. 모니터, 검사지, 책, 스마트폰을 비롯한 일상의 모든 것들이 환해졌다.
하지만 TV를 볼 때는 조금 불편했다. 평소처럼 뒤로 기대면 초점이 맞지 않아 화면이 흐릿했다. 등을 세우고 턱을 당겨야만 또렷하게 보였다. 가끔 예쁜 안경태로 분위기 전환을 하곤 했었는데, 고가의 렌즈 가격 때문에 일상의 작은 취미 하나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