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 집은 늘 아빠 친구분들로 북적였다. 사람 좋아하는 기분파 아빠가 늘 2차를 우리 집에서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나도 오며 가며 대화를 얻어듣게 됐는데 그중 가장 이상한 표현은 이런 말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응, 하는 일 없이 바쁘네, 바빠
그땐 왠지 그 말이 이상하면서도 힙하게 들렸다. 그 말을 하는 표정은 언뜻 자랑스러워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그런 말을 차용해서 써왔다.
막상 내가 사회생활을 해보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말인지... '하는 일이 없는데 당최 바쁠 수가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그 말을 남발했던 내 속에는 무슨 심보가 들어있었던 걸까?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말은 두 가지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1. 나는 무지 바쁜 사람이다. 잘 나가는 걸로 인정해주라!
2. 하는 일이 무척 많은데 그걸 다 했다고 하기엔 일이 끝나지가 않는다! 지친다!
나름 해석을 해봐도 여전히 안타깝다.
왜?
마음이 계속 분주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를 내가 인정해주고 지지하기보단, 타인의 인정과 지지가 목말라 계속 내달린 탓이다. 실제로는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지 않을 수 있는데, 너무 잘하고픈 마음이 커서 내 마음이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 탓이다.
나는 늘 생각이 많아 머릿속이 터지고 각성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돼 잠도 잘 못 이루는 편이다. 그중 일 생각이 가장 비중이 높다 보니 스트레스 취약성도 정비례한다. 작년 이맘땐 주말도 밤도 없이 일에만 매달리다 자율신경 실조증 이란 판정까지 받았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래서 요즘은 나름 의도적으로 신경을 쓴다.
1. 매월 하루는 꼭 자기 돌봄 데이로 비워두고 그날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2. 주말엔 아무리 다음날부터 일 폭탄이 예고돼있어도 절대 컴퓨터 앞에 앉지 않는다.
3. 조금만 더 하면 이 일을 끝내리라는 텐션이 붙어도 12시 전후엔 업무 보는 책상 앞에서 떠난다. 덕분에 근래 몇 달간은 밤샘근무는 안 한듯하다.
나는 인디펜던트 워커이기 때문에 업무시간도 자유롭지만 그만큼 일과 생활 분리가 365일 안되기도 십상이다. 따라서 의도적인 쉼표 찍기가 필요하다.
하는 말도 바꿔야 한다.
나는 언제부터 언제까진 바빠(ON) 하지만 이 날, 이 날은 쉬어~(OFF)
내 시간 정리를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배열하는 게 최우선이다. 일은 늘상 그때그때 임박해서 한꺼번에 몰려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휴식은 내가 정해놓을 수 있지만 스킵하는 게 더 쉽다. 내가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사수가 저녁 안 먹고 일하는 야근 예찬론부터 알려줄 정도니, 우리는 일벌레가 되길 주입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