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즐겨보던 스포츠 중 하나가 프로레슬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WWE 프로레슬링(과거에는 WWF였으나 이 글에서는 WWE로 통일)이다. 헐크 호건, 워리어, 언더테이커의 경기를 숨직이며 보았고, 조금 더 커서는 스톤 콜드와 더락과 같은 차세대 스타들의 기술을 흉내내며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레슬러인양 놀았다. 나와 그리고 동시대 친구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 바로 WWE 프로레슬링이다.
성인이 되고 잊고 지냈던 WWE 프로레슬링을 오랜만에 접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레슬링이 아닌 다큐멘터리였다. 지금의 WWE를 만든 빈스 맥마흔에 관한 다큐멘터리 <미스터 맥마흔>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엄청난 영상이었다. 올해 본 그 어떤 영상보다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보는 내내 충격의 연속이었다. 상상도 못한 프로레슬링의 민낯과 빈스 맥마흔의 기상천외한 생각과 행동에 머리가 띵했다.
<미스터 맥마흔>은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엄청난 인사이트를 선사한다. 윤리적 관점에서 봐도 그렇고, 미국 문화라는 관점에서 봐도 그렇고, 더 크게는 자본주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수많은 이야기거리를 끌어내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내가 조금 더 집중한 것은 비즈니스였다. 말하고 싶은 내용이 너무나도 많기에 2회에 걸쳐서 적어볼까 한다. 오늘은 일단 세 가지다.
빈스 맥마흔이 아버지가 운영하던 WWE를 물려받을 즈음에는 미국에서 프로레슬링은 지역 스포츠에 가까웠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나라에 지역별로 대표 소주가 있는 것처럼 타지역을 서로 넘보지 않는 분위기였다. 법으로 제한한 것은 아니었으나 암묵적인 룰이었다.
빈스 맥마흔은 생각의 크기가 달랐다. 미국 더 나아가 전세계적인 레슬링 단체를 꿈꿨다. 그리고 공격적으로 타 지역에서도 경기를 진행했고, 미국 전역에 송출되는 방송도 진행했다. 그러다보니 각 지역을 대표하는 프로레슬러가 속속 WWE로 오기 시작했다. 되는 자는 더욱 잘되고, 안되는 자는 더욱 안되는 마태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유튜버 주언규 씨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수십명한테 팔 생각을 하면 지인 판매를 생각하고, 수천-수만 명의 고객을 생각하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그리고 수천만명 이상을 생각하면 아마존 비즈니스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이다. 꿈이 작으면 비즈니스의 가능성도 작아진다. 이를 빈스 맥마흔이 제대로 보여주었다.
여러분을 배신한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여러분을 법적으로 고소한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 절대 아닐 것이다. 빈스 맥마흔은 달랐다. 본인을 배신하고 경쟁 업체로 떠났던 최고의 스타인 헐크 호건과 시간이 흘러 다시 일하며 돈독한 사이를 회복했다. 경쟁업체를 이끌며 WWE를 파산직전까지 몰고간 에릭 비숍을 본인의 회사로 불러 메인 프로그램인 WWE RAW를 맡겼다. 심지어 본인을 성추행으로 고소했던 세이블을 다시 고용하여 본인이 당했던 법적인 문제를 패러디하는 스토리까지 만들었다.
어떻게 이 모든 게 가능했을까? 빈스 맥마흔은 어떤 기준으로 이러한 판단을 한걸까? 그가 한 말에 그 답이 있다. "제 철학은 이렇습니다. '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든 관중은 무엇을 원하는가?" 다시 말헤 그는 고객 중심을 넘어 고객 집착을 실현하는 사람이었다.
SNS에 글을 올리다보면 이따금씩 악플러를 만나게 된다. 특히나 의도치 않게 특정 게시물이 조회수가 폭발하면 의도치 않게 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그중에는 꼭 악플러가 함께 한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조심하게 된다.
개인 뿐만이 아니다. 회사를 운영하다보면 고객의 날선 반응에 위축이 되기도 한다. 공들여서 광고를 하는데 소비자의 악플을 접하면 주춤거리게 된다. 몇몇은 광고를 바로 중단하기도 한다. 빈스 맥마흔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야유'는 돈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연기한 '미스터 맥마흔'이라는 캐릭터는 관중의 엄청난 미움을 받는 캐릭터였다. 그의 딸 스테파니 맥마흔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위축되었겠지만 그는 바로 느꼈다. 호감과 비호감 모두 강렬할수록 돈이 된다고 말이다. 그가 무서워했던 것은 관중의 비호감이 아니라 무감정이었다.
브랜드 컨설팅을 하면서 비슷한 사례를 본적이 있다. 컨설팅을 하면 경쟁사 파악을 하게 되는데, 업계내 1위 브랜드가 고객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광고로 엄청난 악플로 시달리는 것을 보았다. 회사나 제품의 문제가 아니라 광고 메시지의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브랜드가 특정될 수 있어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고객이 숨기고 싶은 니즈를 건드린 것이다. "이제부터 불매다", "이렇게 기분나쁜 광고는 처음이다"와 같은 반응만 보면 브랜드의 매출이 급감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오히려 껑충 뛰었다. 광고는 고객의 극단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만큼 니즈를 강렬하게 찔렀고, 그에 대한 해결책인 제품에 대한 수요는 자연스레 늘었다.
사진: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