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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Aug 21. 2022

작가의 의도대로만 읽어야 합니까?

탈구축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멀리 했었다. 


내가 다닌 대학은 학부생도 졸업논문을 내야 했는데, 논문 크게 두 로 나눌 수 있었다. '문학'과 '어학'. 졸업생 대부분은 '문학' 관련 논문을 썼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는 모든 동기생은 '문학'관련 논문을 썼다. 그것이 더 쓰기 쉽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어학'관련 논문을 썼다.


졸업논문마저 다들 쓰는 '문학'이 아닌 '어학'을 선택할 정도로 문학을 좋아하지 않게 된 계기는 아마도 학창 시절 국어 시험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의도를 맞추어야 하는 문제들과 마주하면서.


국어시험을 볼 때마다 작가의 의도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출제자는 작가의 의도를 100% 알고 있는 것인가?", "왜 내 마음대로 작품을 읽으면 안 되는 것인가?"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국어 시험 볼 때마다 중이 되지 않았다. 스스로를 힘겹게 다독이며 최대한 출제자의 의도를 만족시키는 내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작가도 본인의 의도를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사진 출처: 중앙일보


이렇게 문학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관점과 감정을 배제하고 작가의 의도를 추측하는 일종의 추리게임에 가까워졌고 그로 인해 문학 대한 흥미는 빠르게 식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의무에서 졸업하고 나서야 다시 문학에 조금씩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문학과 다시 친해지기 위해서라도 내가 작가의 의도대로만 읽지 않으려했던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 작가도 본인의 의도를 정확히 모른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통해 대중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졌다. 후에 많은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긴 했지만 우리 100%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다양한 분야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 여 지속되고 있다.


'무의식'이라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작가의 의도를 순도 100% 반영한 작품을 써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독자의 반응을 통해 나도 몰랐던 내 글의 의도 혹은 해석의 여지를 발견하곤 한다. 뒤늦게 나의 기질이 글에 반영되었음을 깨닫기도 하고, 혹은 나의 콤플렉스로 인해 특정 주제를 언급하는 문장이 유독 설명이 길어지거나 모호해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작가'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이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작가도 본인의 작품을 100% 파악하기란 어렵다. 무의식이 그리고 우연이 의식적인 쓰기 행위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사가판 유대문화론>에 따르면 롤랑바르트는 이미 50년 전에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텍스트의 '창조자이자 통제자'로서의 '오서(author)'라는 것은 근대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2. 작품의 가능성을 확장해야 한다.


설령 새로운 과학적 발견 혹은 신인류(혹은 AI)가 탄생하여 작가의 의도만 100% 반영한 작품이 탄생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의도대로만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맞가?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해가 뜨고 지는' 신(혹은 우주)의 작품에 대해서도 인류는 얼마나 다양한 해석을 해왔는가? 이 작품에서 누군가는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보았고 또다른 누군가는 위기와 기회를 보았다. 이러한 열린 해석으로 인류 인식의 지평은 끝없이 확장되어 왔다. 신(혹은 우주)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같이 인간이 만든 작품에 대서도 해석의 여지를 닫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작가의 의도가 가장 높은 수준의 해석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공공연히 말하더라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나 나름의 해석은 통해 작품을 읽곤 한다. 이른바 탈구축이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글쓴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때로는 의도적으로 거슬러 새로운 문맥으로 텍스트를 읽는 것. 과거에 '탈구축'이라고 불렀던 이 방법은 지금 젊은 독자에게는 '2차 창작'이라고 이해시키는 게 쉬울 겁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은 개념을 캐릭터 삼아 만들어내는 2차 창작입니다. 원작(=루소의 텍스트)에서 '일반의지'는 시골에 사는 승복을 걸친 별 볼 일 없는 중년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를 퉁명스러운 천재 소녀 프로그래머 같은 괴짜 캐릭터로 바꾸고 싶은 겁니다.

- 아즈마 히로키의 <느슨하게 철학하기> 중 -


이러한 탈구축을 통해 음악으로 따지면 리메이크 혹은 리믹스를 해서 나의 인식과 감각에 가장 즐거운 무언가를 2차 창작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2차 창작은 후에 나만의 글쓰기에 참신한 밑재료가 되기도 한다. 만약 모든 작품을 이러한 탈구축 없이 작가의 의도대로만 읽게 된다면 창작의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협소해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바를 "작가의 의도대로 읽지 말자"로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작가의 의도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물론 오해 또한 내 주장대로라면 독자의 몫이겠지만...)


물론 이런 주장에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이 그의 누이동생에 의해 곡해되어 나치의 사상으로 악용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는 작품을 독자 마음대로 해석한 것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국가가 특정한 사상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고의적으로 이용한 부작용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반대의 경우를 가정해보면 나치를 위한 사상을 정립한 철학자의 작품을 세계평화를 위한 사상이라고 해석해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고 이것을 작가의 의도대로 읽지 않음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작가의 입장에서는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독자가 작품을 해석한다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글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가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100% 나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이 글 또한 내가 '발행'을 누르는 순간 100% 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발행을 눌러본다.



Photo by Wonderlan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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