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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Feb 07. 2023

"누구 편이야?"라고 묻는 시대에 살아남기


아이들이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 인생 최대의 난제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 질문에 "둘 다"라는 복수정답이 허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영리한 아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엄마'와 '아빠'라는 답 사이를 신속하게 왔다 갔다 하고, 솔직한 아이는 듣는 이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고 본인의 감정을 단호하게 드러내기도 하며, 마음 약한 아이는 어찌할 줄 몰라 울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누구의 편이냐?"라는 뉘앙스의 질문을 끊임없이 받게 된다. 아이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 상대에 따라 답을 달리하는 사람, 묵비권을 행사하는 사람 등과 같이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중 어떠한 부류일까?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 선배와 둘이서 지방으로 출장 가는 길이었다.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사적인 이야기를 포함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선배가 느닷없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너 대통령 누구 뽑았니?



가족에게도 누구한테 투표했는지를 잘 밝히지 않았는데 회사 선배가 이러한 질문을 느닷없이 하니 순간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답하기 싫다는 의견을 부드럽게 표했다. 그 선배는 본인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이를 해석하는 듯 보였다. 나의 묵비권을 본인과 같은 정치성향으로 여기고 좋아했으니 말이다. 


종교도 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적혀있고,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종교분쟁이 크지 않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이슈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진다. 특히 다음과 같은 개신교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는 더더욱.


개독교 싫어하시죠?


원래 기독교는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등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파를 일컫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 개신교'로 자리 잡힌 것 같다. 그래서 개신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비하하는 '개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이에 대한 의견을 묻는 사람들이 간혹 가다가 있다. 사실 의견을 묻는다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 달라는 질문을 가장한 요청에 가깝다. 개신교 신자는 아니지만 모든 것을 일반화해서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해 가며 비난하는 것은 좋지 않고, 개신교 입장에서도 이러한 비난 속에서 자신들이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입장이다.


내가 이처럼 "누구 편이야?"라는 질문에 나쁘게 말하면 두리뭉실하게 말하고, 좋게 말하면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이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 번 입장을 정하면 본인이 틀리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도 믿음을 수정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편을 정하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는 어려워진다.


두 번째로 나의 기질 자체가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기본적으로 어디에 메이고 싶지 않은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누구의 편이 되는 것 자체를 상당히 불편해하는 편이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자신을 보호하듯, 누구 편이냐라는 질문에도 그렇게 반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큰 소리가 있다. 바로 '젠더 이슈'다. 타고난 성별이 이미 누구의 편인지 답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젠더 이슈에는 균형 잡힌 대답도 존재하지 않고, 침묵도 효과가 없다. 성별에 따른 기질과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남녀 모두 이득을 볼 때도 불이익을 볼 때도 있다는 게 나의 기본적인 입장이지만 이러한 답변은 모든 성별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답이라 여겨지는 듯하다. 심하게는 남녀 모두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 입장처럼 보인다. 16세기에 에라스뮈스가 중립을 지키다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듯이 말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이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 세력으로 양분되었을 때 양측의 지도자들은 에라스뮈스에게 누구의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끊임없이 요구다. 에라스뮈스는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시대의 지성이었기에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양 진영의 성패가 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톨릭의 편을 들면 교구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고, 개신교의 편을 들면 종교 개혁의 시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끝까지 자유의 몸으로 남았다.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 자유의 대가는 가혹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에 따르면 마르틴 루터는 그의 이름에 대고 심한 저주를 퍼부었고 가톨릭 교회는 그의 모든 책을 금서목록에 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뮈스는 죽을 때까지 누구의 편도 아니고자 했으며, 모든 광신에 맞서는 자유로운 사상을 추구했다.  


그래서 중립이 죄악시되고 누구의 편이냐고 끊임없이 묻는 이 시대에 묵비권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나에게 남은 유일한 답은 '에라스뮈스'일 것이다.



P.S. 프랑스의 사상가 알베르 카뮈도 의도는 다소 다르지만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만드는데 일조했기에 재판관처럼 누구를 처단할 권리를 갖기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말이다.  



사진: UnsplashMathew Schwar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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