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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an 06. 2018

기억을 반납하다

추억은 변색되고 시간은 지나간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사놓고 쓰지 않은 크로키 북과 스프링노트 밑에 숨어 있던 책은 밀란 쿤데라가 쓴 무의미의 축제였다. 난해한 내용이라 200페이지도 안 되는 얇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읽는 데 꼬박 하루를 다 쓴 기억이 났다. 그렇게 오랜만에 불쑥 떠오른 기억은 잊고 있던 다른 기억들까지 함께 불러왔다. 기억의 연쇄작용에는 예외가 없다. 다 읽고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줄 알았던 쿤데라는 내가 산 게 아니라 빌린 책이었다. 3년 전 만나던 사람과 주말마다 갔던 북카페에서 빌려온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책의 거취를 고민하게 되었다. 책 한 권을 돌려주려고 더 이상 볼일 없는 동네까지 굳이 가고 싶지는 않았다. 
  
 우편으로 발송할까 했지만 주소나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책을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함부로 버리는 건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고민 끝에 나는 책을 돌려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코트를 입고 책을 넣은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주말이라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친구를 만나러 데이트를 하러 지하철을 탄 많은 사람들 중에 빌린 지 3년이 넘은 책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 일 것이다. 신길역에 내려 5호선을 타러 걸어가는 동안 나는 집에서 목동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다는 것을 실감했다. 1호선에서 5호선을 갈아타고 오목교에서 내려서는 02번 버스로 환승한다. 오목교역을 한 바퀴 돌아 주민센터 앞에 내리면 1시간이 조금 넘는 여정이 끝난다. 
  
 번거롭고 귀찮았던 이 길을 한 때 나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오고 갔다.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멀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시절. 그때는 그랬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귀찮고 번거로울 뿐이다. 5호선을 갈아타면서 돌아올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보니 우편으로 보내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책을 돌려주지 않고 3년이 지났다는 시점에서 예의를 따질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역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한 때나마 익숙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감흥 없는 풍경은 눈길을 돌리자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마을버스 천장의 하차 벨을 누르고 주민센터 앞에서 내렸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왼손에 들고 카페를 향해 걸었다. 주말이라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가로질러 카페에 도착했다. 대여 코너에 놓여있는 리스트를 들고 쿤데라의 책을 찾아본다. 내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무의미의 축제는 목록에서 빠져있다. 카운터의 담당자에게 책을 돌려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할까 하다 커피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포스트잇과 볼펜을 꺼내 ‘이제야 돌려드립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메모를 적어 책장 앞에 붙였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비우고 난 후에 리스트의 공란에 무의미의 축제를 적어 넣고. 대출일자는 2014년 반납일자는 2017년으로 기록해두었다. 그리고는 가장 잘 보이는 책장에 꽂아두고 밖으로 나왔다. 추억이나 감상 같은 것들이 미처 올라올 틈도 없이 나는 할 일을 끝냈다. 3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애틋한 추억 같은 건 남아있지도 않았지만.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던 눈에 익은 거리를 잠시 바라봤다. 학원가를 향해 걸어가는 가방을 멘 아이들. 길고 푹신한 소파가 있는 스타벅스. 제법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었던 나폴레옹. 달라진 것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혼자 멀뚱히 서있었다. 다시 올 일 없을 줄 알았던 동네를 찾아와 보니 내가 예전과는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변하고 추억은 변색되어 단순한 기억이 된다. 이제 열어 볼일 없는 기억을 놔두고 나 혼자만 버스를 탔다. 쿤데라의 책은 앞으로 계속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유통기한이 누락되어 있던 옛 기억에 폐기 날짜를 붙여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멀고 번거롭고 피곤했다. 다시 갈 일 없는 1시간 거리의 동네에 대한 얼마 안 되는 기억은 희미해지다 결국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분실된 물건은 돌아가야 할 자리가 정해져 있다. 3년간 내 책상 서랍 밑에 묻혀있던 쿤데라의 소설책은 이제 제 자리를 찾았다.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책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 나오던 추억을 나는 무심하게 바라봤다. 감흥 없는 추억을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나는 담담하게 그것들을 처리했다. 책을 원래 있던 곳에 돌려줌으로써 나는 마침표가 찍혀있던 지난 20대의 한 페이지를 파쇄기에 넣고 완전히 갈아버렸다. 미련이나 후회 혹은 아쉬움 같은 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시간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과거를 현실에서 밀어냈다. 내가 그랬듯 내 기억 한편에 남은 사람 역시 그랬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현재를 산다. 봄날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몇 번이 계절이 지나는 동안 그 봄날보다 즐거웠던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다. 열어 볼일 없는 추억의 페이지는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 희미해지다 전부 희석되어버렸다. 감흥도 의미도 없는 시간들을 서른이 되어 돌아보고 있자니 우스웠다. 그때의 나도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 시간들을 떠올리고 정리해버린 지금의 나도. 그렇게 잊혀갔고 결국에는 잊었다. 27살의 내가 아련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 서른의 나는 그저 피곤함과 귀찮음을 느낄 뿐이었다. 무의미해진 기억들은 지난 시간 속에 파묻혀 있다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그때의 제 자리가 아닌 내 자리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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