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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an 11. 2018

승자 없는 전쟁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저녁을 먹고 뉴스를 보다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스위스의 동물보호법이 개정되면서 바닷가재를 산 채로 끓는 물에 넣어 요리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스위스 정부는 앞으로 바닷가재를 조리할 때 기절을 시켜서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고 밝혔다. 산 채로 조리될 때 갑각류가 느낄 수 있는 극심한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생명존중에 부합한다는 그들의 결정은 정말 유럽다운 것이었다. 1930년대 유럽에서 세계 최초의 동물보호법이 탄생했으니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 갑각류의 생명권을 존중하는 보호법이 등장하게 된 것도 납득이 간다. 
  
 생명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률적인 합의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 범위가 점점 확장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개와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시작으로 멸종위기종과 가축 이제는 식재료로 분류되는 생물에게도 보호권이 적용된다는 걸 보면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물론 동물에서 식물 나아가서는 생태계 전반에 대한 정책적인 보호와 지원이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개발과 혁신이 상생과 보존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과는 별개로 생명권의 인정범위를 새롭게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스위스 정부의 법 개정은 상당히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기사 아래 달린 댓글의 반응은 내 생각과는 여러 모로 차이가 있어 보였다. 
  
 반려동물에나 적용해야 할 보호법을 지나치게 확장시켰다는 의견과 그에 대한 반박이 대립하는 가운데 ‘한국식 동물 애호가들은 개나 고양이만 불쌍해한다.’는 댓글이 눈길을 끌었다. 그 밑에는 개와 고양이가 다른 동물들보다 사람과 가까운 동물이라는 반박과 모든 생명은 동등하다는 재반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동물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다룬 기사를 접할 때면 이런 무의미한 논쟁을 거의 매번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의견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동물보호법을 보면 사람에게 친숙한 애완동물에서부터 자연계의 동물로 그 적용범위가 확대되어왔다. 당장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동물들에게 법적인 영향력이 먼저 적용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생명존중에 관한 윤리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차별과 차등 없이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두 주장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독립적인 견해로서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애초에 논쟁을 통해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며 서로 헐뜯을 필요가 없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인가 싶다. 토론이 한국 사회에서 본질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토론은 서로의 의견을 듣고 다른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합의점을 찾는 것이다. 승패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근거와 치밀한 논리를 통해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는 태도는 토론을 논쟁으로 변질시킨다. 온라인은 편을 가르고 대립하는 이러한 소모적인 논쟁으로 매일 같이 몸살을 앓고 있다.
  
 한 때 인터넷 상의 이슈가 되었던 ‘탕수육 부먹 찍먹 논쟁’을 떠올려보자. 애초에 탕수육을 부어 먹고 찍어 먹는 것 따위로 싸울 필요가 없다. 반은 부어먹고 반은 찍어 먹으면 그만이다. 양쪽의 의견을 토대로 긍정적인 합의점을 도출하는 합리적인 논의가 정당한 절차와 해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다. 말로 사람을 이기려 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행위는 없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반대되는 논리를 철저히 파괴하려는 의도가 깃든 표현은 한없이 날카롭고 매섭다. 서슬 퍼런 공격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논쟁은 그렇게 시작되고 감정적인 논조의 언쟁이 오고 가다 보면 결과적으로는 갈등과 상처만 남는다. 
  
 논쟁에는 결코 훈훈한 마무리가 없다.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점은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역할을 하므로 둘 중 한쪽은 반드시 패배자가 된다. 문제는 기준이 철저히 개인적인 관점이다 보니 패자는 납득하지 못한 채 마음이 상하고 승자 역시 소모적인 논쟁에서 이겨도 얻는 것이 없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 독한 말을 주고받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경쟁이 일상화된 환경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이긴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 상황에서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협력과 상생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화려한 달변과 날카로운 독설이 카리스마로 인정받는 사회적 분위기도 문제가 있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화술이 경쟁력으로 추앙받는 사회에서 경청과 존중을 토대로 협력하는 문화가 과연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이기기 위해 애쓰지 말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사고의 전환이 현실에서든 온라인에서든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인터넷 공간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또 다른 사회다. 얼굴을 모르는 상대방이 쓴 내용에 발끈하고 달려들어 이기려는 마음을 버리자. 나와 다른 사람이 내가 가진 견해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세상은 상식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을 따르고 인정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조금이나마 논쟁이 줄어들지 않을까. 나 혼자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승리하기 위해 협력하는 의식이 언젠가는 이 사회에 꼭 자리 잡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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