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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an 22. 2018

늦여름의 장마

계절처럼 삶도 사람도 변한다

 7월부터 시작된 장마는 한여름의 시작을 알리며 8월 초까지 며칠 간격으로 성실하게 비를 뿌렸다. 밤 기온이 30도가 넘는 열대야의 시작과 함께 잦아들었던 장맛비는 8월 중순을 넘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밤낮으로 쏟아져 내렸다. 장마가 끝났다는 뉴스가 무색하게 한 주 내내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비를 보면 아직 가을이 오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8월의 마지막까지 여름은 장맛비를 뿌리며 좀 더 머무르다 갈 모양이다. 그래도 늦은 밤 지금처럼 글을 쓰면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생각해보면 비 오는 날만큼 읽고 쓰기 좋은 날은 없는 것 같다.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빗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면 차분한 마음으로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굵은 빗줄기가 만들어내는 반복적인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고막에 안정적인 자극을 준다. 자연이 만든 백색소음은 거부감 없이 기분 좋게 청신경 깊숙이 스며들고 시간이 지나면 빗소리가 만든 커튼이 사방을 포근하게 둘러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여름의 장맛비가 만들어내는 이 편안한 느낌을 나는 ‘기분 좋은 고립’이라고 부른다. 거리의 소음과 한밤의 소란스러움까지 모두 덮어주는 여름의 리듬. 늦은 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배경음악 삼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기쁨은 장마철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그래서 나는 장마를 싫어하면서도 막상 여름만 되면 아이러니하게 큰 비를 기다린다. 


 어린 시절의 내게 장마철은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 수 없는 지루한 기간이었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던 중고등학교 때는 비 오는 날의 복잡한 등하굣길이 싫었다. 높은 습도로 인한 끈적거림과 우중충한 날씨 그리고 우산을 써도 옷을 흠뻑 젖게 만드는 장대비까지. 나는 한여름의 찜통더위보다 궂은 장마를 더 싫어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참 신기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점점 변한다는 말이 맞나 보다. 사람처럼 계절도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니고 있다. 다만 장단점이 섞여있을 때 좋은 점을 찾아내는 데는 특별한 계기가 필요하다. 언제부터 비 오는 계절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는지를 생각해보니 대학생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21살의 나는 학교도서관에서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찌감치 시작된 장마는 8월이 되도록 끝날 줄 몰랐고 하루 종일 쏟아지는 장맛비 때문인지 도서관은 장마철 내내 텅 비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책을 대출해주고 반납받는 일을 했던 나는 할 일이 없어 이른 오전부터 퇴근하기 전까지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테이블 가득 책을 쌓아놓고 읽는 동안 창밖으로 장맛비는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귓가에 들리는 빗소리는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어냈다. 커다란 도서관은 오직 나만을 위한 개인 서고처럼 느껴졌고 나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받는 기쁨을 누렸다. 그때 나는 비 오는 계절이 갖는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유난히 길었던 21살의 장마는 살면서 처음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깨달았던 시기였다. 긴 장마가 꼭 나쁘기만 한건 아니라는 생각도 이때 처음 했던 것 같다. 


 좋고 나쁜 것에 완전함이란 없다. 사람의 내면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며 생각은 바뀌기 마련이고 사소한 계기로 인해 인식이 변화하기도 한다. 비 오는 계절을 싫어했던 내가 빗소리를 들으며 읽고 쓰기 좋은 여름날을 기다리게 된 것처럼. 사람도 상황도 천천히 변해간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변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인간의 내면세계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이자 섭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결같다는 말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흔들리면서 변화하고 이전에는 몰랐던 의미를 발견해가면서 삶의 영역은 조금씩 확장된다. 변함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가장 쉽게 변할 수 있는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살면서 사람에 대한 진심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이 의외로 쉽게 달라져버린 경험이 적지 않았다. 길고 지루한 장마를 싫어하던 내가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듯이 살다 보면 사람은 좋든 싫든 변화한다. 그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저 당연한 과정 일뿐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몇 시간째 내리던 장대비가 가늘어졌다. 비가 만들어내는 차분한 리듬이 잦아들면서 묻혀있던 소리들이 하나 둘 들리기 시작한다. 젖은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 소리, 비에 흠뻑 젖은 나뭇잎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그 사이로 점점 작아지는 빗소리가 속삭임처럼 잔잔하다. 기분 좋은 밤이다. 밤새 뒤척이게 만드는 열대야 대신 빗소리를 들으며 맘껏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준 여름에게 나는 감사해야 할 것 같다. 
  

 하늘을 뒤덮었던 짙은 회색 구름이 사이로 드문드문 밤하늘이 보인다. 빠르게 흘러가는 비구름을 보니 내일 아침은 모처럼 하늘이 맑을 모양이다. 여름과 가을을 잇는 늦여름, 그 사이에 걸친 장마전선이 비를 뿌리고 천천히 한걸음 뒤로 물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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