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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an 22. 2024

혼자가 익숙한 사람들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이유

 인간관계를 맺는 일은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토대를 다지고 기초공사가 마무리되면 감정이 생긴다.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성격과 취향 같은 여러 정보를 주고받는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정서적인 교류도 잦아진다. 그러다 보면 가슴속에 한 채의 집이 완성된다. 완공되고 나면 집을 주기적으로 관리해줘야 한다. 발길이 뜸해지면 잡초가 자라고 서로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더 이상 찾지 않게 된다. 그러다 관계가 끝나면 마음이 떠난 빈집을 철거해야 한다. 정성 들여 쌓은 담을 허물고 깊게 뿌리 박힌 기둥을 뽑아낸다. 집이 있던 자리는 커다란 상처로 남아 폐허가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누구나 아픔을 겪는다. 관계를 맺는 일이나 이별 후에 정리하는 일이나 적지 않은 에너지를 쓴다.


  좋은 마무리도 있지만 나쁜 이별도 있다. 사랑이든 사람이든 안 좋은 기억을 남기는 관계는 상처가 된다. 소중한 진심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릴 때의 고통은 상당하다. 한 마디 예고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에 일방적인 피해자는 없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잔혹한 가해자였을 것이다. 한 번씩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관계의 피로를 느낄 때면 회의감이 든다. 열패감에 가까운 감정을 힘겹게 떨쳐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사람을 가려서 만나고 진심을 내주지 말자는 결심을 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나이를 막론하고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여러 번 마음고생을 하다 보면 사람에게 큰 기대를 갖지 않게 된다. 대인관계 역시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무던해진다. 적당히 넘기고 속내를 감추고 깊지 않은 교류를 지속한다. 사람이 싫은 것도 아니고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것도 아니다. 그저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을 뿐이다. 감정을 소모하면서 상처받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가슴속에 애써 지은 집을 손수 허무는 일은 괴롭고 피곤하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내면에 집을 짓는 일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거리를 두게 된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면 감정적으로 얽힐 일은 줄어든다. 내 인간관계속으로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보이지 않는 벽을 쌓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정서적인 보호구역이다. 간섭받지 않는 청정구역이다. 혼자가 편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프라이버시를 근거로 사람들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한다. 복잡한 인간관계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이제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세상 모두가 하나뿐인 인간이지만 그중에 아주 특별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달라도 느끼는 감정은 대체로 다 비슷하다. 감동도 감흥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저 미묘하게 반응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나 낯선 인연을 마주쳐도 기대나 설렘이 없다.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얕은 대인관계를 맺는 결정적인 이유다. 가벼운 관계를 추구하면 표현이나 몸가짐도 가벼워진다. 깊은 관계가 아니므로 몸과 마음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혼자가 익숙해지면 둘이 되는 것도 부담스럽다. 관계는 약속과 책임이 동반되는 사회적인 계약이다. 연애와 결혼의 무게는 다르겠지만 약속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혼자가 편한 사람은 내가 아닌 타인이 귀찮을 수밖에 없다. 감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고 해도 간섭은 질색이다.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서로 맞춰야 하는 부분들은 관계를 이어나가다 보면 숙제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피곤해져서 거리를 둔다. 책임이 의무감처럼 느껴지면 관계는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의도적일 수도 있고 일방적으로 돌아설 때도 있다. 둘은 즐겁지만 혼자만큼 편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별과 나이를 떠나서 이런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둘을 넘어서 셋넷이 되면 책임은 몇 배로 늘어난다. 그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 때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다.


 사회적 안전망이 복지제도라면 심리적 안전망은 대인관계다. 가족이나 친구들 같은 소중한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굳건한 지지대의 역할을 한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 충동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 홀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은 심리적인 안전망이 상대적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마음의 벽을 넘는 것은 어렵다. 친절하지만 친밀하지 않은 관계는 위기의 순간에 지지대가 될 수 없다.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않는 것처럼 너무 큰 자유는 안정감이 없다. 서로를 붙잡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신뢰가 싹트기 힘들다. 오픈마인드로 서로 피해 주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사는 삶은 ‘개방적인 고립’이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관계에 함께하는 미래는 없는 법이다.


 외로움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다. 쓸쓸하게 살다 고독사를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한국에서 살면서 종종 드는 생각은 중간이 없다는 점이다. 양극단의 선택지속에서 나에게 맞는 중간 어디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최적화가 어려운 만큼 사람들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다. 그러나 결정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다들 선택할 때도 눈치를 보고 선택하고 나서도 평가에 신경을 쓴다.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지금의 나 홀로 라이프 역시 그런 면이 강하다.


 외로운 것은 싫지만 혼자는 좋은 사람들. 둘은 부담스럽지만 혼자 살기는 싫은 사람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느라 피곤할 것이다. 건강한 개인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다. 행복한 둘이 되는 일 역시 어렵다. 외톨이가 된 어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여럿이 살아도 고독한 어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을 찾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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