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민 Aug 01. 2024

마음이 무너지다

 밤늦게 장맛비가 쏟아졌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동안 비는 그쳤다. 가슴이 답답해서 바람을 쐬려고 창문을 열었다. 창 밖에 보이는 공원 여기저기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겼다. 그 위로 하얀 달이 물에 잠겨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에 걸린 진짜 달은 빽빽하게 솟은 나뭇가지 뒤로 숨은 것 같았다. 나뭇잎에 붙어있던 빗방울이 떨어지자 물 위에 떠있는 달이 천천히 뭉개졌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지는 파문을 따라 일그러졌다 휘어지기를 반복했다. 달이 본래의 모습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물속에 가라앉은 달이 뭉개지는 것처럼 마음도 짓눌리면 일그러진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는 적응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여전히 버겁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혼란스럽다. 파문이 일어난 물웅덩이 표면 위로 파문이 퍼져나간다.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진다. 하지만 초연해지는 것은 아니다. 작은 물방울 하나만 떨어져도 수면 위의 달은 이지러진다. 한 번씩 별 것 아닌 일로 마음이 크게 요동친다.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나면 극심한 피로감이 찾아온다. 나약함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감정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비슷한 고통을 여러 번 겪으면서 성장한다는 말은 틀렸다. 나이가 들어도 시간이 지나도 통증은 똑같이 아프다. 상실은 비참하고 이별은 처참하다. 사람이나 기회를 놓친 후에 남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 후회에 가까운 감정이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연습을 하는 것뿐이다. 경험은 성장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저 잃어버린 것들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합리화하고 시간으로 돌아오지 않는 순간을 덮는다. 성장보다는 순응에 가까운 행동이다.


 시간이나 경험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착각이다. 사람들은 경험이라는 말을 빌려서 상실을 합리화한다. 지나고 나면 다 좋아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시간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통증을 조금 무뎌지게 만드는 진통제에 가깝다. 제대로 된 약은 망각이다. 하지만 기억은 생각과 다르게 작동한다. 머리가 내리는 명령을 거의 듣지 않으므로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늘 그랬던 것처럼 견디는 것뿐이다. 억지로 삼킨 고통은 가슴속을 파고든다.


 의지할 만한 것을 찾아본 적도 있었지만 의미는 없었다. 자기 개발서에 실려있는 조언은 이론에 불과했다. 남 말을 믿는 것은 자유지만 결과는 내 몫이다. 틀 속에 나를 밀어 넣는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스스로를 몰아세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가치를 찾아내는 일은 피곤하고 지루하다. 잃어버린 것들을 세어가며 상처를 덧나게 할 필요가 있을까? 병을 참는다고 약이 되지는 않는다. 희망사항은 희망고문으로 이어진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그냥 소리를 지르는 게 낫다.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차피 현실의 경계선을 벗어날 일은 없다. 삶은 아주 질긴 고무줄과 같다. 끊어질 것처럼 늘어져도 결국 원래대로 돌아온다. 수면 위에 비친 달이 바람에 흔들려도 진짜 달은 하늘에 그대로 박혀있다. 우울한 상상은 막상 선을 넘지 않는다. 줄을 끊고 달아날만한 용기는 없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 때가 되면 늘 그랬듯이 일상으로 복귀한다. 전진은 없고 반복만 있다. 창 밖으로 다시 비가 쏟아진다. 물 위에 비친 달은 또다시 허물어지는 중이다.

이전 04화 벗어날 수 없는 권태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