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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 당신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by 김태민
김태민, <deskape>, 종이에 색연필, 12x23cm.

노력은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의 영역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노력, 근성, 의지 같은 말을 쓰면서 절대치를 규정하려고 한다. 조언을 가장한 훈수나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위협을 하는 사람들이 널려있다. 다채로운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과 같은 경우의 수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정답을 하나로 규정하면 개성 있는 해답은 전부 오답이 된다. 노력이나 선택에 관한 자유가 없는 것 같다. 남들처럼 하고 남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잘못된 삶을 산다고 규정해 버린다. 결과만 놓고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결과는 분명 가치가 있지만 삶의 의미는 대부분 과정 속에 있다.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성장한다. 과정 안에서 발견한 여러 가지 의미는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자주 방황하고 여러 번 삽질하는 것 같지만 때가 되면 결국 궤도를 찾는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만 훈수꾼이 주변에 많으면 삶이 고단하다. 훈수를 듣다 보면 맥이 빠진다. 아이러니한 점은 다들 말만 늘어놓을 뿐 정작 발언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나를 억지로 끌어내리는 이들은 내가 갈길을 뿌옇게 가리는 안개와 같다.

선택에 따라 가능성은 무한해질 수 있지만 선택지를 한정해 버린다. 효과성과 효율성을 최고로 치는 한국 사회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노력하는 획일화된 루틴을 강조하고 강요한다. 정답으로 인정받는 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종종 중도포기자들이 나온다. 기권을 선언하고 이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회는 그들에게 낙오자와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고 부적응자라는 타이틀을 달아버린다. 과연 그럴까? 그들은 해복으로 가는 또 다른 길을 선택한 것뿐이다.


한국은 대안이나 다양성 같은 단어를 패배자의 변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결과와 가치만 놓고 평가하고 비교한다. 숫자와 등급으로 모든 것을 판별하는 문화에서 승자는 극소수다. 절대다수는 패배자로 전락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찾아서 자존감을 채우려고 혈안이 된다. 비교와 경쟁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평생 동안 받고 살아야 하는 한국인들의 정신은 건강할까? 중도포기자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코스를 벗어난다. 제대로 표현하면 이탈이 아니라 선택이다. 버티지 못하고 등을 돌린 도망자가 아니다. 그저 새로운 대안을 고른 사람들일 뿐이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살다 내려놓은 이들을 본 적 있다. 그들은 본인이 선택한 삶에 만족했다.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동네에서 자영업을 시작한 어떤 사람은 주변에서 온갖 비난을 들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국내에 들어와서 평범한 회사를 다니는 지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교대를 나와서 프리랜서가 된 아는 동생은 가족들로부터 홀대받았던 시기의 맘고생을 털어놨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길은 늘 하나다. 갓길이나 샛길은 없다. 다른 길을 고르면 존중 대신에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무조건 남들을 따라가야 사람 대우를 받는다.


다른 선택을 하는 이들은 이해받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오해하고 폄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양성 없는 획일화된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이다. 통제된 환경은 깔끔해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엉망이다. 부러움을 사는 신축아파트 입주민들이 새집증후군에 시달리는 것처럼 겉과 속은 다르다. 정규교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독학으로 건축가가 된 안도 타다오가 한국에서 살았다면 어떤 일을 하게 됐을까?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남들보다 늦으면 안 된다는 강박은 집요한 추적자처럼 따라붙는다. 남들보다 못하면 실패자라는 사회적 인식은 시대가 변해도 그대로다. 10년쯤 지나면 세상이 변할까? 20년 정도 흐르고 나면 의식이나 문화가 달라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몸만 자라고 머리는 그대로인 어른 아이다. 비극적인 피터팬이다. 행복의 다양한 정의가 아니라 행복의 기준이 되는 정답이 강제되는 세상.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다르다는 말보다 틀리다는 표현을 더 자주 접하게 된다. 90년대나 2020년대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30년이 지났지만 변화는 아직 멀었다.


여전히 차이는 차별의 근거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해답이 아니라 정답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꾹꾹 누르고 살거나 모른 척 눈을 돌리고 지낸다. 성장에 열을 올리고 높은 등급을 따려고 치열하게 살아도 공허감과 탈력감이 찾아온다. 서열화된 자신의 삶을 평가받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모든 세대는 행복을 모르고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비교하는 법 말고 행복해지는 법을 아예 모른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이들은 놀지 않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도전하면서 크고 작은 성과를 얻는다. 하지만 사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기준에서 벗어났으므로 단호한 태도로 재고를 거부한다. 등급을 매길만한 결과물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저 오답으로 취급받는다. 평가와 비아냥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태도가 필요하다. 내면의 안전거리를 정하면 매정한 집중포화로부터 마음을 지킬 수 있다. 후회를 해도 내가 하고 포기하고 다시 시작해도 결정은 내 몫이다. 틀에서 벗어나려면 틀 속으로 끌려들어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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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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