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김로이 어르신은 올해로 여든셋이 되었다.
21세기가 끝나고 22세기가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 인간의 평균수명은 90세를 넘었고 사람들은 이제 120세 인생을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무상하여 로이는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끼고 모아 두었던 노후자금을 모두 털어 '정든 요양원'에 입주하게 되었다.
정든 요양원 111호. 하얗고 조용한 요양원 복도 끝에 위치한 작은 방. 로이는 어제 이 방의 임시 주인이 되었다.
침대 옆 창에서 겨울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이 방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 누울만한 큰 캡슐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로이는 캡슐에 들어가 왼 팔뚝을 왼쪽 팔걸이에 올렸다. 오늘을 위해 미리 칩 이식 수술을 받아둔 로이였다.
'찰칵'
무언가 결합되는 소리가 났다. 로이의 칩과 캡슐이 연결되는 소리다. 이윽고 캡슐의 유리 커버가 닫히더니 치이익 소리가 났다. 수면가스였다. 로이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마 옆에 약간의 압박감이 스쳤고, 이내 세계는 가라앉았다. 무채색의 현실이 점차 흐려지고, 따스한 햇살과 바람 소리가 그의 감각을 덮기 시작했다.
*
눈을 떴을 때, 로이는 다시 젊어진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스물일곱.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하던 바로 그 해의 몸이었다. 거울 속 얼굴은 오랜 친구처럼 낯익고도 어색했다. 피부는 팽팽했고, 등은 곧게 펴져 있었다. 무릎도, 허리도 아프지 않았다.
옛날 어린 시절 읽었던 웹소설에서나 그렸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정든 요양의 '가상정원 시스템'이다. 수많은 노인들이 큰돈을 내고 정든 요양원에 들어오는 이유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은 여생의 적적함과 고독스러움을 잊기 위해 개인 캡슐을 통해 언제든 이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다.
정든 요양원의 '가상정원 시스템'은 사용자가 가상현실 속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 이 가상현실 속에서 유저는 모든 감각을 현실과 똑같이 느낄 수 있다. 먹는 것, 움직이는 것, 감정, 냄새, 촉각 등 모든 것들이 똑같다.
(다만 물리적인 고통만은 시스템상 경미한 수준으로 조절되어 유저에게 전달된다. 극심한 고통은 살짝 따끔한 정도로 치환되는 정도다.)
특이한 것은, 유저가 접속을 종료해도 캐릭터들이 마치 가상인물처럼 계속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AI가 행동 패턴을 학습해서 한번 등록된 된 캐릭터는 유저처럼 계속 가상공간에 남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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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정원에 접속한 첫날, 로이는 가만히 도시를 걸었다. 따뜻한 바람이 볼을 스쳤고, 골목마다 익숙한 감정들이 피어났다. 가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했다. 사람들의 발소리, 공원에 울려 퍼지는 하모니카, 커피숍 앞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팝송. 그는 그 모든 것이 감동이었다. 다른 유저들은 이미 삼삼오오 모여 곳곳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가상세계 곳곳을 탐험하던 로이는 당구장에 들렀다. 거기서 로이는 두웅이라는 노인을 만났다.
"형도 입주자죠? 큐 좀 돌리시죠. 여기 당구대 상태 꽤 좋아요."
두웅은 70대 후반쯤 되어 보였고, 이미 가상정원 속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데 익숙해 보였다. 그는 유쾌하고 솔직했으며, 말끝마다 진심이 묻어났다. 둘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로이와 두웅은 낮에는 당구를 치고, 저녁에는 가상세계의 작은 선술집에서 맥주잔을 부딪쳤다. 때때로는 거리 공연이 펼쳐지는 가상 공원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점점 이 공간에 정이 들고 있었다.
***
그러던 어느 날, 로이는 마리를 만나게 되었다. 재즈바 한쪽 구석에서 검정 원피스를 입고 와인을 홀짝이던 그녀는 조용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로이가 무심히 다가가 말을 걸었고, 그녀는 낯설지 않다는 듯 웃었다.
"여기 처음이시죠? 춤추는 법, 제가 알려드릴게요."
그녀의 손끝은 따뜻했고, 몸짓은 조심스러웠다. 둘은 말없이 재즈 선율에 몸을 맡겼다. 하루하루 일만 하며 보냈던 젊은 날, 이런 바에서 춤을 추는 삶은 살면서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삶이다. 젊은 날에 그렇게 한 번도 못 즐기던 것을 여든셋이 되어서야 로이는 즐기고 있었다. 마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이와 두웅과 마리는 친구가 되어 가상공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마치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양 하루하루를 보냈다.
날이 갈수록 로이는 불안했다. 언제까지 이 삶이 계속될 수 있을까?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매번 만나던 장소에 들렀으나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삼일. 기다리던 중, 두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마리 할머니... 돌아가셨어요. 제가 며칠 전에 응급차에 실려 가는 것은 봤는데..."
유저가 사망한 것을 시스템이 인지하는 순간, 시스템은 캐릭터를 영구 휴면처리해 버린다. 캐릭터가 계속 '가상정원'에 존재하려면, 유저는 명예의 전당에 등록하듯이 큰돈을 내고 별도의 등록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면 죽은 후에도 유족들이 '가상정원'에 들어와 가상세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유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다만 그 돈이 무지막지하게 큰돈이라서, 평범한 요양원 입주자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 밤, 로이와 두웅은 마리의 가상 장례식을 열었다. 꽃잎을 흩날리는 공원을 배경으로, 그들이 부르던 노래를 다시 틀고, 조그마한 무덤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주 마시던 와인을 무덤 위에 뿌렸다. AI는 슬픔을 몰랐지만, 그들은 기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존재는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 거죠.”
두웅이 조용히 말했다.
*****
몇 달이 흐른 뒤였다. 김로이는 스스로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식사량은 줄었고, 간호사들의 표정도 달라졌다.
로이는 결심했다. 평생 아등바등 모은 돈,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모아둔 그 돈을 쓰기로. 언제 한번 나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정든 요양원에 요청서를 제출했다. 자신과 마리의 캐릭터를 영구보존해 달라는 요청서였다. 두웅까지 해 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돈이 모자라다. 아마 자녀들이 알면 까무러칠 것이다. 자신을 크게 원망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평생을 계획적으로 살아온 로이다. 그는 비로소 즉흥적인 마무리를 꿈꾼다.
가상정원에서 로이와 마리는 다시 만났다.
둘은 벚나무 아래에 앉아 바람을 맞았다. 말없이 손을 맞잡고, 오래도록 웃었다. 봄바람이 따뜻하여 평범한 하루였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