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영수증과 바랜 옷]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 구겨진 영수증이 나왔다.
올리브영에서 물건을 사고 나중에 혹 환불에 필요할까 싶어 가방 한켠에 뒀던 영수증이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나 잉크가 다 바래서 유심히 보아야만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
가방 구석에 쭈그린 채 내 노트북과 책에 치이다가 드디어 빛을 받나 싶었겠지만, 결국 분리수거통에 구겨진 채 버려지는 영수증.
사회생활을 처음 할 때, 가계부를 쓴답시고 영수증을 매번 모았었다. 지금에야 자동으로 카드내역을 집계해 주지만, 매일매일 수기로 어플이나 엑셀에 가계부를 기입하던 노가다낭만이 있던 시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정말이지 별 쓸 일 없는 종이 영수증.
불쌍해. 하지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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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들 중에 정말 필요한 것을 거의 못 봤다.
매번 계절이 바뀌면 옷을 다 끄집어내 옷정리를 한다. 이번에는 기필코 안 입는 옷을 대대적으로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아까 인터넷에서 본 네이비 니트 한벌을 살 수 있는 명분이 생기니까.
1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과감히 버려도 된댔다. 그래서 조금 해진 초록 티셔츠를 버리기로 했다.
아니다, 이건 그래도 재작년에는 한번 입었던 거잖아? 일단 두자. 그렇다면 다음 타깃은 회색 셔츠다. 재질이 맘에 안 들어 몇 번 입지 않았었지. 아니 근데 이것도, 저 바지랑 입으면 또 괜찮을 것 같은데? 게다가 비싸게 주고 산 것이 마음에 걸린다.
... 하다 보니 결국 버리게 된 것은 누가 봐도 버려야 마땅한, 색까지 바래버린 니트 한 벌뿐이었다.
버리는 것은 참 어렵다. 나머지 옷들 중 많은 애매한 옷들이 그저 또 옷장에 숨어 있다가 내 선택을 받지 못한 채 내년 이맘때쯤 다시 시험대에 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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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카톡 프사가 바뀔 때 사진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우리.
우리의 관계도 어쩌면 구겨진 영수증 아니면 바랜 옷 같은 관계가 된 것은 아닐까. 세월이 흘러 이제 필요하지 않은 관계. 혹시나 필요할까봐 버리지 못하면서도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관계 말이다.
그럭저럭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이 잠시 즐거웠던 우리 시간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스쳐가는 인연이라도 우리는 전생에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수없이 많은 우연들을 쌓아 왔을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영수증이고 누군가의 헌 옷이다. 그러니 버리는 것과 버려지는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버려짐의 당연함을 끌어안고 격려할 일이다. 스쳐간 수많은 영수증과 옷들처럼, 카드내역과 사진 속에서 함께 했던 것이 그 공감의 증거다.
사진: Unsplash의Brett Jord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