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미는 막 비행을 끝내고 LA공항에 도착한 참이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보딩 브리지가 체결되고 나서야, 설미는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태평양을 12시간 넘게 가로지르는 동안 손아귀에 꼭 쥐고 있던 긴장감이 풀어져 스르르 흩어졌다. 부기장이 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매 비행이 긴장되긴 마찬가지다. 이번 비행에서 항공기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연료를 체크하고, 매뉴얼을 확인하던 순간들이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파일럿은 매 루틴을 완벽하게 수행해야 한다. 긴 루틴이 한번 끝났다.
- 부지런한 남자 어때?
- 카페에 진상 손님 있음. 어휴
- 보고 싶다. 도착하면 연락해!
설미의 휴대폰에는 커피, 핫도그 사진과 함께 병호의 톡이 여럿 와 있었다. 설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 잘 도착했어. 이따 숙소 가서 연락할게
병호에게 간단히 답장을 하고 나니, 이제는 루틴이 정말 끝난 느낌이다. 설미는 잠깐 눈을 감았다.
*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설미는 편한 바지와 맨투맨으로 갈아입었다. 기장과 동료들이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라도 하자고 했지만 왠지 소화가 안 될 것 같아 패스했다. LA의 시간은 이미 저녁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설미는 병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응, 잘 도착했어? 힘들었겠다. 별일 없었지?"
"그럼, 나 이래 봬도 전문가라고. 방금 호텔 들어왔어. 잘 있었어? 핫도그 맛있었겠네."
병호와 통화할 때 설미는 안정감을 느낀다. 병호의 목소리는 따뜻하면서 차갑다. 아니, 차가우면서 따뜻한 것 같기도. 설미에게 끓음과 식음이 반복된다면, 병호에게는 끓음과 식음이 함께 존재한다.
"응, 아침부터 바쁜 하루였다구. 진상 손님만 아니었으면 기분이 계속 좋았을 텐데 말이야."
"아, 그랬어? 어떤 손님이었는데?"
"그 사람이 빵 탔다고 사장한테 막 쏘아붙이는 거야. 커피도 쓰다고 들으라는 듯이 얘기하고. 초보 사장인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더라고."
병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설미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려 했다.
"그래? 그 사람 좀 심했네."
"맞아. 진짜 기분 나빴어. 나는 맛있게 잘 먹었거든. 그래서 나올 때 사장님한테 일부러 인사했어. '잘 먹었습니다' 하고. 잘했지?"
병호는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 한국의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카페 사장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부지런하게 아침을 맞이했는지.
기특하네.라고 설미는 생각했다. 평소라면 늦잠을 자고 12시가 넘어서 점심을 먹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병호는 나름의 모험을 다녀온 것이다. 설미는 '태평양을 넘는 나만 모험을 떠나는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병호는 자신이 없는 주말을 즐기는 방식을 터득해 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분도 풀 겸, 공주분식집에서 떡볶이 먹었어."
공주분식집은 떡볶이에 어묵을 팍팍 넣어줘서 설미가 특히 좋아하는 동네 분식집이다. 설미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병호로부터 이어지는 시시콜콜한 일상의 파편들. 하지만 여전히 설미의 귓가에는 12시간 동안 들었던 엔진 소리가 아직 맴돌고 있었다.
"병호야."
"응?"
"미안한데, 나 좀 피곤해. 12시간 넘게 비행했거든."
설미는 병호의 말을 끊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병호는 자신이 너무 떠들어댔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아, 미안. 내가 너무 신나서...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내 얘기만 했네. 자기는 어땠어? 거기 숙소는 괜찮아? "
"아냐, 일단 좀 잘래."
"알았어. 내일 연락해."
전화를 끊고 나서, 설미는 천장을 바라봤다. 정말 졸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화는 계속할 수 있었는데. 자신이 병호에게 너무 까칠했나 싶어 금방 미안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미안함보다 졸음이 더 크게 몰려온 덕분에 금방 잠이 들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몽롱한 와중에도 설미는 자신이 포인트를 떠올렸다. 떡볶이였다.
'치사해. 서울 돌아가서 나랑 같이 먹으면 될 것을 왜 혼자 먹는 거야? 나도 떡볶이 먹고 싶다고. 공주떡볶이!'
설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너무 예민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행 후에는 늘 그랬다. 긴장이 풀리면 묵혀뒀던 예민함이 돋아난다. 이럴 때는 일단 자는 것이 상책이다.
설미는 눈을 감았다. 10초도 안되어 잠든 것 같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
하늘을 나는 꿈이다. 하지만 비행기 안이 아니다. 설미는 말 그대로 하늘을 날고 있다. 바람을 가르고 구름 사이를 헤엄친다. 어린 시절, 비행기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되어 있다. 비행기 조종대를 잡을 때와 같은 긴장감은 없다. 솟구쳤다가 떨어지며 공중곡예를 한다. 풍경이 바뀌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에 설미는 가슴이 쿵쾅거린다.
하늘을 날며 춤을 추면 그것은 비행일까 춤일까.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며 춤추듯 몸을 들썩거리던 설미는 자신이 마치 신인류로 진화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몸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설미의 발목에 가느다란 줄이 묶여 있다. 줄은 비행기로 이어져 있고 조종석에서는 기장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설미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본다.
누군가 옆에서 함께 날고 있다. 병호다. 그는 설미와는 달리,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날고 있다. 다만 그는 비행이 어색하다. 한 번도 날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병호는 손발을 어색하게 움직이며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
설미가 손을 뻗어 병호를 잡는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등을 살포시 안아 준다. 병호의 심장박동이 들린다. 눈을 잠시 감는다. 줄이 연결되어 있으면 어때. 균형을 못 잡으면 어때. 우리는 함께 하늘을 날고 있는 걸.
*
꿈을 깼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지금쯤 한국은 밤늦은 시간이다. 병호는 내일 출근을 위해 잠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병호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한 통, 톡이 두 개 와 있었다.
- 미안해, 내가 너무 떠들었어.
- 푹 쉬어. 사랑해.
설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이 더 미안해야 했다. 병호는 비행할 동안 재미있을 일이 없었을 것이 명백한 설미를 위해 좋은 날씨를, 일상을 전해 주려 한 것뿐이었다.
설미는 칵테일바에서 파일럿이 되겠다는 꿈을 병호에게 이야기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는 병호의 감탄하는 눈빛을 보며, '이 사람이면 나를 이해해 줄 거야'라는 확신이 생겼었다. 나중에 병호에게 들어보니 그 순간 조금 두려웠다고 했었지. 자신에게는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설미에게 있다고.
앞으로 병호가 설미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측 가능한 삶을 지향하는 병호에게 설미의 불규칙함은 쉬운 상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호는 설미와 함께 기꺼이 날아줄 사람이다. 매번 어색하게 손발을 움직이며.
*
설미는 병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호는 한 번의 신호음 만에 전화를 받았다.
"설미야?"
"응. 바로 받네?"
"잠이 안 와서 OTT 보고 있었어. 요즘 나온 그 서울 자가에 대... 아, 아니. 이제 컨디션은 괜.."
"미안해, 어제."
설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병호가 당황했다.
"응..?"
"미안하다고, 어제. 그렇게 끊어버려서."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설미 피곤한데 내가 너무 떠들었잖아."
"미안해. 내가 좀 예민했어. 비행 끝나서 조금 예민했나 봐.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병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미가 말을 이었다.
"그 진상 손님 정말 너무했다. 빵 좀 탔으면 어때. 커피 좀 쓰면 어때. 사장님이 처음 하시는 거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근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아, 그, 그렇지?"
"응"
병호는 갑작스러운 설미의 말에 놀란 듯했다. 서로 사과를 했으니, 이쯤에서 적당히 머쓱해하고 넘어가는 게 다음 수순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 진상, 내가 한마디 해줄걸 그랬나 봐. 다음에 핫도그 또 팔아드려야지."
"아이고, 꼭 그래라. 우리 병호 착하네."
"에이, 뭐..."
병호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설미는 병호의 웃음소리가 좋았다.
"병호야."
"응?"
"고마워."
"뭐가?"
"그냥. 다."
병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도 고마워."
둘은 음성만으로도 서로가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느꼈다. 온기와 냉기가 섞여 적당한 따뜻함이 퍼지고 있다.
"근데.... 공주분식점은 다음에 나랑 가. 떡볶이 혼자 먹은 건 좀 치사해"
설미의 말에 병호는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알겠어, 공주님."
*
호텔 조식을 먹으며, 설미는 다시금 병호를 떠올렸다. 루틴한 회사 일에도 기복 없이 바른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병호는 자신의 복잡함을 보완해 주고 있다. 고맙다. 설미는 LA의 쨍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병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문득 병호의 오래된 가방이 떠올랐다. 병호는 해진 검은색 백팩을 몇 년째 쓰고 있었다. 병호의 해진 가방처럼, 오래 함께한 것들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당연한 것은 없다. 함께 날아주는 사람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모두 노력해야 존재하는 것들이다.
조식을 먹고 나면, 설미는 LA 시내로 병호의 가방을 사러 갈 것이다. 비싸고 튼튼한 가방을 사줘야지.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에게 오래가도록 지탱해 줄 것을 건네고 싶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