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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제이 Oct 29. 2022

계테크스터디 #12
최애 드라마 후유증

관계의 결말

 이제 마지막 스터디다. 마지막 스터디답게, 오늘은 관계의 끝,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끝은 끝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내포한다. 어려운 프로젝트의 끝, 학기의 끝과 같은 끝들은 결말 이후에 잠깐의 휴식이나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게 하게 한다. 그러나 새롭게 만나고, 에너지를 쓰고, 가까워지고,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며, 지지고 볶다 정이 들었던 한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마치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대체로 아쉽고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이 보통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언젠가 끝이 난다. 연인 간의 이별, 이사나 전학, 연락이 끊기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짐, 모임 탈퇴, 퇴사, 그리고 죽음까지. 인생에서 우리는 크든 작든 관계가 끝나는 순간을 끊임없이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일반적인 관계의 종료, 이를테면 학교를 졸업하며 끊어지는 교우관계 같은 결말은 누구나 겪어 왔을 것이며 인생에 큰 타격이 되지 않으니 넘어가자. 이런 결말들은 특별한 요령이 필요 없고, 자연스럽게 잘 마무리하기만 하면 된다. 혹시 관계의 기승전결을 거치며 깨달은 점이 있다면 복기하면서 다음 인간관계에 적용하고, 언젠가 상대와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이 걱정된다면 원만하고 협력적인 태도로 일단 종료 버튼을 누르면 된다. 


 그러나 소중했던 사람과의 아쉬움이 남는 결말은 다르다. 아쉬운, 슬픈, 힘든, 극복하기 힘든, 좌절스러운 등의 형용사가 붙는 결말들은 결말이 결말로 완결되지 않고 마음 한편에 여운을 남긴다. 이 결말들은 물리적으로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만으로는 완전히 끝나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잔류하며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곤 한다.


모든 관계는 언젠가 관계의 종착역에 도달한다.




  20대 초반, 사람을 좋아하던 그 시절의 나는 유난히 관계의 결말을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었다. 무척 가까운 관계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이미 끝나버린 관계, 잠깐의 오해로 너무나도 쉽게 끝이 나버린 관계들과 그로 인한 상실감. 그때의 나처럼, 지금도 많은 20대들이 성인이 된 후 달라진 인간관계의 양상을 느끼고는 실망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어렵게 의미를 부여하였으나 쉽게 종료되는 허무한 인간관계를 몇 차례 경험하고 나면 '역시 사회에서 만난 관계는 진짜 관계가 아냐' 하고 회의감을 느끼기 십상이다. 그래서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기피하거나, 피상적인 관계만 전전하는 방식으로 언젠가 있을 관계의 마지막을 대비한다.


 최애(최고 애정)하는 드라마가 끝났을 때 한동안 후유증에 빠져 허덕인 경험이 있다. 매주 드라마를 하는 시간만 목 빠져라 기다렸었는데, 드라마가 끝나니 기다림의 낙이 한순간에 없어진 탓이었고, 치사한 작가가 결말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오픈 결말로 드라마를 끝낸 탓이었다. 나는 드라마의 팬카페를 전전하면서 속편이 제작되지는 않는지, 작가가 의도한 결말이 뭔지, 드라마 곳곳에 숨겨져 있던 복선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다녔고 한동안 그 드라마 후유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 


한 회만, 한 회만 더 내놓으란 말이야!!


 완전히 마음속을 떠나지 않은 드라마처럼 상대방과의 경험, 대화, 공감 같은 것들이 완결 맺지 못하고 관계가 종료될 때, 특히 그것이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일 때 우리는 큰 아쉬움을 안고 과거를 쫓게 된다. 관계의 후유증은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불쑥불쑥 마음을 흔들면서 우리가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기 힘들게 한다.


 후유증이 심하다고 해서 드라마를 안 보지는 않듯, 아쉬운 이별이 있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다음 관계를 진정성 있게 맞이해야 한다. 끝을 미리 걱정하고 상대가 선을 넘어오지 않도록 지레 날을 세우거나, 내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앞서서 포기하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들을 놓치게 된다. 이는 꽤 괜찮은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예고편만 보고 스스로 시청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언젠가 끝이 예상될지라도, 지금 이 순간 마주한 관계에 최선을 다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는 방법이며, 서로의 인생을 공감할 수 있는 좋은 동반자를 언젠가 만났을 때 놓치지 않고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다.




 심리학 용어 중에 자이가르닉 효과가 있다. 이 효과는 마치지 못한 일을 마음속에서 쉽게 지우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완결되지 않았다고 인식하여 불편함이 계속되고 잔상이 남을 수 있는 심리 상태다. 헤어지고 잊지 못하는 연인,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난 후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 계속 생각나는 트라우마, 다음 회의 여운을 남기고 끝난 드라마 에피소드 같은 것 들에서 우리는 자이가르닉 효과를 경험한다.


 미완성된 경험이 주는 불편함을 잘 활용하면 상대의 관심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도 있다. 티비 프로그램 중간에 광고를 넣어서 계속 방송을 보게 하는 것이나, 일의 단계를 여러 개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 그 예가 되겠다. 인간관계에서는 상대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끝내기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편이 상대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는 데 유리하다.


마침표를 찍지 않는 관계는 우리를 계속 뒤돌아 보게 한다.


 자이가르닉 효과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관계를 명확히 끝맺고 결말을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아 헤어진 애인과의 재회,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직장 동료와의 관계 같은 것들을 회복해 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휩싸이기보다는, 담담하게 끝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끈질긴 고민은 운 좋게 관계의 회복이라는 보상을 가져다 줄 수도 있으나, 결과에 관계없이 당신 인생에 있어서는 자기 파괴적일 가능성이 높다.


 기존 관계의 마무리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해서도 더욱 필요하다.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나,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발목을 잡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확실히 끝난, 또는 끝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관계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자.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늘뿐이며,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물론 말만큼 쉽지 않은 것은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리 결말을 그려보고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미리 끝을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은 나중에 한꺼번에 받을 충격에 대해 완충작용을 해 준다. 그리고 이왕이면 영리하게 준비하자. 직장생활의 명언 중에, ‘매일 다닐 것처럼 일하고, 내일 당장 퇴사해도 괜찮도록 준비하라’는 말이 있다. 내 일에 최선을 다하되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있을 때 쿨하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원인사 업무를 처음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한 본부장이 부장 한 명을 임원 승진자로 추천했다. 리더십이나 평판 등이 경쟁자들보다 부족하여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하였으나, 그 팀장이 담당한 사업분야에는 한 번도 임원 승진한 사례가 없었기에 상징적으로 승진시키고, 더욱 성과를 낼 수 있게 하겠다는 본부장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그 부장은 임원이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다음 해 그 본부장이 퇴임을 하게 되면서, 안타깝게도 지지세력이 없던 신임 임원은 1년 만에 퇴임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는 역시 정글이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부장은 나름의 고유 업무영역이 있었기 때문에, 임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까지는 회사를 다닐 수 있었을 거다. 억지로 임원으로 승진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물론 지금쯤 다른 회사에서 잘 지내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이처럼 끝은 갑자기 찾아온다. 임원이 퇴임에 앞서 어떤 준비를 해 왔을지는 모르나, 만약 제2의 미래를 준비해 왔다면 퇴임은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 회사에 목매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의 관계, 끝이 보이는 관계에 너무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인간관계도 언젠가는 끝날 수 있음을 인정하자. 바로 오늘 끝이 날 수 있고,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중요하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끝을 시뮬레이션해 보고 지금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준비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미리 상대에게 정을 떼라는 말은 아니다. 부모, 형제와 같이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가족 간의 관계까지 마지막을 앞서서 걱정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지금의 관계에 충실하되, 끝나지 않을 것 같아도 언젠가 끝은 오기 마련인 만큼 관계의 드라마가 끝났을 때 의연할 줄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관계에 너무 의존적이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더 집중해야 한다. 나와 상대방의 중요도를 51:49로 맞추자. 어떤 경우에도 상대가 50이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랑했던, 좋아했던, 의존했던, 그래서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상대방이 없어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의 삶의 패턴을 변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불편함과 결핍을 느끼며, 이미 습관화되어 편하고 익숙한 것을 쫓으려는 인간의 본능은 이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트레스 상황으로 인식한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때로 혼자 있어도 하루를 거뜬히 버틸 수 있도록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는 꿋꿋함이 필요하다.


인생의 모든 일에는 밝은 면이 있다. 결핍에 매몰되지 말고 가진 것에 충실하자. 




 너무 아쉽다면, 또는 계속 미련이 남는다면, 과거를 억지로 잊으려 하기보다는 새로운 관계로 덮는 것도 방법이다. 왜 오래된 연애 격언도 있지 않는가,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 컴퓨터 폴더에 파일을 덮어쓰기 하듯이, 억지로 지우려 하기보다는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 보자. 과거는 지우려 할수록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과거와 싸우지 말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믿자.


 공채로 입사해 10년간 젊음을 바치고 정을 붙였던 회사를 이직하던 순간, 나는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 쌓아 온 회사에서의 경험, 일하는 방식, 인간관계 같은 것들을 대부분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이직 후에 처음 1년은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막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롭게 일을 적응하며 시간이 흐르니 지금은 예전 회사에서의 경험이 먼 과거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것으로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는 당장 효과가 없어 보일 수 있으나, 결국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천천히 하다 보면 빨리 될 거다.


 예전 회사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 친한 몇몇과는 아직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고, 나와 뜻이 잘 맞는 친구는 지금의 회사에 지원하여 이직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연이 있다면, 끝난 듯 보였던 관계가 다시 연결되기도 한다. 다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며 살아간다. 끝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계테크스터디도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당신과 나도 이제 슬슬 잠시 이별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스터디가 끝나 우리가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며 우리의 공통 관심사인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날까지, 오늘 우리 대화의 진정성을 서로가 잊지 않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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