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고정], [하루의 축적]
[시선고정]
타인과 눈을 지속적으로 마주 보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칠 수도 있겠으나 길게 응시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서양인들은 참 쉽게도 하던데 말이다.
왜 그럴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의 표정과 모습과 생각이 상대방에게 '읽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 것 같다. 마치 옥상 위에서 선탠을 하려고 돗자리를 깔고 벌러덩 누워서 태양을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사실, 해본 적은 없다) 또는 내가 휴대폰 비밀번호를 누르는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
상대방에 대한 나의 호의 또는 적의, 또는 중립적 지향점이 들통나는 것이 두렵나 보다.
그래서 10여 년 전 어느 책에서 읽었던 '아이컨택이 어려우면, 상대의 인중을 주시하라!'는 팁을 지금까지 무척 요긴하게 쓰고 있다. 어설프게 눈 마주쳤다 피하거나 어정쩡하게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지 말고, 당당하게 코 밑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눈을 마주할 때 보다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내가 이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것인지 인중과 대화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고, 가끔 한 점만 뚫어져라 보면 무슨 매직아이 하듯 사팔뜨기가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를 평가받는 느낌이 든다. 시선을 두는 방식에 정답이 어디 있겠냐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상하지는 않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의식 위로 떠오르면, 어색함을 줄이기 위해 괜히 휴대폰을 보거나 시선을 내리깔기도 한다.
어렵거나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그 의식은 더 또렷해진다. 그러면 스텝이 꼬이고 대화도 산으로 갈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코드가 잘 맞는 사람과 신나게 긴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대화가 끝난 뒤, 내가 1시간 내내 그 사람과 눈을 계속 마주치며 대화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이 워낙 말을 재미있게 잘했다는 점과 내 관심을 끄는 주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대화는 언제나 나에게 에너지를 준다. 대화에 집중한 나의 눈은 더 이상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창구가 된다. 그날처럼,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를 굳이 의식하지 않고도 편안한 사이가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시선을 억지로 고정시키지 않아도 편한 사이가 좋다.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그러하면 더욱 좋겠다. 그래서 지금의 컨디션, 큰 고민부터 일상의 작은 즐거움, 나와 당신이 살아온 역사 같은 것들이 술술 튀어나오는 대화가 더 자주 있기를.
서로의 눈을 응시하던 시선이 대화의 경계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와 천연덕스럽게 마주한다. 이러한 일련의 비고정성은, 반드시 우리의 관계가 어수선하거나 내외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시선의 균형을 찾아가며 서로의 주변을 공전하듯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하루의 축적]
나를 규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어온 하루의 축적들.
또는 생각, 추억, 경험, 감각 같은 것들
찬란하기 위해 몸을 가볍게 풀어내야 한다.
기지개를 켜고 다 괜찮을 거다, 그럴 수도 있다,
하는 말들로 쉬이 지나가다 보면
너무 무겁거나 혼탁하지 않아 오히려 빛날 것이다
자전거 체인이 빠져서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온다거나,
애지중지 키운 선인장이 죽어버리는 사건과 같은
아프지 않게, 하지만 아프게도
나를 콕콕 찌르는 순간들에는 휩쓸리지 않아야겠다.
어린 날, 젊은 시절, 또는 언젠가 무엇을 해도 즐거웠던,
하루의 기대가 충만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이 선선했던 그날처럼,
지금의 나만이 쌓을 수 있는 지금의 하루를,
두 팔 벌려 축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