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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든 Oct 06. 2024

단편소설 1 : 우연 겹침

[단편소설 1]

 노을이 지는 한강공원을 달리는 일은 경수에게 무척 상쾌한 일이었다. 구름이 불그스름하고 태양이 타오르듯 붉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마치 인생의 여러 막 중 한 막의 피날레를 가로지르는 느낌마저 든다.


 그날도 경수는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복장을 갖춰 입고 서둘러 조깅에 나섰다. 한강공원까지는 버스로 다섯 정거장을 가야 한다. 그래도 집 근처 복잡한 도심을 이리저리 비켜가며 달리는 것보다는 역시 한강공원을 달리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한강공원에 도착한 경수는 짧은 스트레칭 후 바로 조깅을 시작했다.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에 무거움이 털어져 나간다.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졌다가도 가끔 잡생각이 들면 꺼지지 않은 화로대처럼 마음속 은은한 잔열이 느껴진다. 그럴 때면 경수는 에라, 하면서 조금 더 스퍼트를 높였다. 한참을 달리던 그는 가빠진 호흡을 고르려고 잠시 속도를 늦췄다.


 경수가 길 근처에서 한 할아버지가 비틀거리며 걷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할아버지? 아니다, 한 60대 정도?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젊어 보인다. 몇 살쯤 되었을까. 뭐라고 불러야 하지? 경수는 찰나의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몸의 균형을 곧 잃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경수는 본능적으로 달리기를 멈추고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경수가 물었다.


 -할... 아니 아저씨, 괜찮으세요?


 경수가 다가가자 노인이 갑자기 쓰러질 듯 몸을 숙였다. 경수는 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굴이 창백하고 누가 봐도 몸이 안 좋은 상태였지만 표정만은 도통 감정을 알 수 없이 오묘했다. 경수는 그의 상태를 살피며 천천히 근처 벤치로 안내했다. 벤치에 앉아 몇 번 심호흡을 하던 노인은 고개를 들어 경수를 바라보았다.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

 -아, 고맙네. 정말 고맙네. 오래간만에 운동을 했는데 무리했나 봐.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
 

 그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허공에 훠이 흔들었다. 곧 그의 안색이 돌아왔고, 숨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분명 천천히 안정되는 것 같았다. 경수는 안도하며 노인 곁에 앉았다.


- 119를 불러드릴까요?

- 아냐, 괜찮아. 고마워.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둘의 호흡은 비슷한 템포로, 그리고 비슷한 정도로 점점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30초? 1분 정도 지났을까. 집으로 부축해 드려야 하나, 그건 과한 친절을 베푸는 건가 하는 고민을 경수가 하고 있을 때, 노인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두툼한 지갑을 꺼내더니, 지갑에서 돈뭉치를 꺼내 경수에게 건넨다. 


- 이걸 받아줘. 자네 덕분에 다치지 않았구먼. 생명의 은인이야. 우리 나이에는 잘못 넘어지기라도 했다간 큰일 난다고.

- 네?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경수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에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그는 봉투를 빠르게 경수에게 쥐어주었다. 그 순간, 석양이 사라지고 시야가 어둑어둑해졌다. 저녁인지 밤인지 모를 순간에서 확연히 밤으로 시간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경수는 이 상황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노인이 휙 몸을 돌렸다. 경수가 말릴 틈도 없이 그는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방금 쓰러질 뻔했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속도였다.


*


 봉투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경수는 다시 노인을 불러 세우려고 그를 쫓았다. 하지만 그는 공원 사이 풀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의외의 속도에 의외의 사라짐이 여전히 얼떨떨하였으나 얼른 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5분 정도를 주변을 쫓아다녔다. 방향이 정말 엇갈린 것인지 어떤 것인지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필 가로등의 불빛이 그리 비치지 않는 위치여서 시야가 유난히 어두웠다.


 경수는 노인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봉투를 일단 열어 보기로 했다. 봉투에는 5만 원짜리 여러 장, 세어보니 정확히 100만 원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경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무슨...'


 돈의 액수를 확인하고 다시금 노인의 흔적을 찾아보려 10분 정도를 돌아다녔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해는 완전히 져서 깜깜해졌다. 그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경수는 일단 가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100만 원. 결코 작은 돈은 아니다. 누군가가 친절을 베푸려고 쓰기에는 너무 큰돈이다. 


 아니다. 근처에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가 많으니 그들에게는 그리 큰돈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인 경수에게는 며칠을 열심히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다. 큰돈은 맞아. 하고 경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걸 경찰에게 신고해야 할까? 뭐라고 하지? 하지만 왠지 노인이 작정하고 준 돈인데 경찰에 신고한다고 한들, 그래서 그를 찾는다고 한들 그가 돈을 다시 가져가지 않을지 모르겠다. 목숨을 구해준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노인의 입장에서는 또 그렇게 고마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


 혼란스러워하던 경수는 어느덧 평소 달리던 루트가 끝나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는 매번 가던 작은 카페로 향했다. 한강뷰 카페는 아니고, 조금 걸어 주택가로 걸어 나와야 갈 수 있는 카페다. 조금 외진 곳이라 손님이 많지 않지만 매장이 밝고 은은한 노래를 틀어주는 작은 카페다. 저녁 달리기를 하고 어두워진 길을 걸어 카페에 도달했을 때 인공적이지만 새로운 밝음을 맞이하는 그 느낌이 경수는 좋았다.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 들어서서 카운터에 주문을 하던 경수는, 한 여성이 카운터 앞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긴 생머리에 경수와 마찬가지로 운동복에 조깅화를 신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카페 직원이 약간 짜증 섞인 표정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 항상 사장님이 계셨는데 오늘은 처음 보는 직원이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묶고 날카롭게 생긴, 얼핏 보면 여고생으로 보이는 20대 초반 정도의 얼굴이다. 그녀의 표정에는 미묘하게 티가 안 날 정도로만 짜증이 섞여 있었다.


- 손님? 카드가 없으신가요?

- 아, 네… 카드를 안 가져왔네요. 커피는 다음에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평범하게 숨을 쉬는 듯하면서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그러나 상대에게 도달하기를 바라는 듯하는 느낌의 약간의 한숨을 흘려보냈다. 경수는 살짝 화가 났다. 아니 잘못한 것 없는 손님이 저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경수는 갑자기 손에 든 100만 원이 떠올랐다. 100만 원을 돌려줄 수 있든 없든 오늘 나는 과분한 보답을 받았으니 조금은 누군가에게 과하게 친절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 괜찮다면.


 경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경수를 바라보다가, 몇 번 거부했다가, 이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커피를 주문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경수가 다니는 회사의 같은 계열사에 다니는 직원이었다. 다른 계열사에 다니다가 이직을 한지 얼마 안 되어 정신이 없다고 한다. 안 그래도 한 주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었는데, 오늘도 정신을 어디다 두고 온 건지 카드를 두고 왔다는 그녀였다.


 신기한 하루다, 하고 경수는 생각했다. 쓰러지려는 노인을 구하려다 100만 원을 받지를 않나, 같은 계열사 직원을 우연히 카페에서 만나지 않나. 요 근래 평범하게 일상을 보냈던 것은 오늘 이런 일들이 있으려고 잠시 삶의 굴곡이 숨고름을 한 것 같기도 하다.


 둘의 대화는 술술 진행되었다. 회사에서의 힘듦이나 조깅 같은 대화의 주제가 잘 맞았는지, 그냥 단순히 코드가 잘 맞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커피 값을 꼭 갚고 싶다며 계좌번호를 불러달라는 그녀에게, 경수는 한술 더 떠서 다음에 커피로 갚아달라며 자기 번호를 불러주었다. 


능구렁이 같은 경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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