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거실을 다른 존재로 채운다는 것
일반적인 가정집이라면 소파를 놓음직한 그 자리에 우리 집에는 내 책상이 차지하고 있다. 그냥 책상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알피가 나의 글쓰기를 응원하며 생일 선물로 사준 특별한 책상이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거실 좌식 테이블에 앉아 함께 밥을 먹을 때 빼고는 우리 집 거실은 오롯이 나를 위한 공간이다. 원룸 오피스텔에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준비하며 방 하나는 안방으로, 현관 옆 널찍한 방은 옷방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아늑한 작은 방을 알피의 서재로 하기로 했다. 단박에 입이 헤 벌어지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알피에게 호탕하게 말했다. “괜찮아. 거실은 다 내 거니까”
집 안의 중심인 거실을 차지한다는 것은 꽤 기분 좋고 기세 등등한 일이다. 여름이 물러나고 햇빛이 조금씩 길게 들어오는 탁 트인 거실의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아침을 사랑한다. 3년에 걸쳐서 하나둘씩 데려온 초록들이 구석마다 곳곳에서 잎사귀를 피워내거나 새로운 줄기를 내미는 걸 구경하는 것도 즐겁다. 그런데 이제 나의 거실을 아기를 위해 내어 줄 때가 온 것이다. 사실 거실을 비우는 것 자체는 간단하다. 안방에 큰 옷장을 들이고 드레스룸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제 멤버가 하나 더 늘었으니 커다란 방 하나를 드레스룸 겸 창고로 쓰는 건 사치니까. 곧 알피의 책상과 나의 책상을 그 방으로 옮겨 합동 작업실로 만들 것이고, 한때 알피의 서재였던 작은 방은 아기방으로 꾸밀 것이다. 나의 거실은 우리와 아기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바꿀 생각이다.
드레스룸이 비워지고 있는 와중에 아직 거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의 책상을 보며 생각한다. 그동안은 내 삶의 거실도 오롯이 내 차지였다. 내 삶의 중심은 내가 잡고 싶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또는 사회가 나 대신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중에 취업에 불리하든 말든 내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집과 한국을 떠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난 7년을 보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무작정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를 배우며 6개월을 지내보기도 했고, 프리랜서로서 한국에서의 정착이 녹록지 않았음에도 끝까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남고 있으니 하고 싶은 건 해야 하고 싫은 건 절대 못하는 성격이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건 아마도 현실을 잘 모르거나 덜 당해봐서이기도 하겠지만 내 안의 자아가 튼튼한 편이라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건강한 자존감인 건지 자아 비대증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자라고 믿고 싶다.
그러니까 거실을 내어준다는 건 간단한 게 아니라는 거다. 내 삶의 중심을 내어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이 조그만 아기는 이미 문자 그대로 내 중심을 차지하고 자라고 있다. 조금씩 볼록해지는 배를 보며 신기하고 즐거운 마음이 들다가도 내 몸이 그냥 내 몸 하나였을 때가 그리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난 끝내 이 거실을 내어줄 수 있을까. 아기가 내 중심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줄 수 있을까. 그게 힘들 순 있어도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자책하진 않기로 했다. 기쁘고도 두려운 마음을 오가며 이번 주말에는 거실을 정리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