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우리라서 다행이야
알피의 한국어가 늘어감에 따라 귀여운 실수도 많이 한다.
연초를 맞아 집안의 수건들을 새것으로 교체를 하면서 그중에 특히 낡은 수건을 가리키며 "이건 앞으로 걸레야" 하고 말해준 적이 있다. 걸레의 용도를 정확히 설명을 안해준 탓에 알피는 '낡은 수건을 걸레라고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며칠 후 헬스장에서 받은 수건이 해져있는 걸 발견한 그는 수건을 다시 가져가 "이거 걸레예요"라고 또박또박 말했고 트레이너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졌단다. 퇴근해서 이야기를 들은 나까지 깔깔거리고 웃자 알피는 시무룩해져서 도대체 어떤 부분이 웃겼던 거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또 한 번은 각자의 나라의 전래동화를 주고받다가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며 떡을 하나씩 뺏어먹다가 결국 떡이 떨어지자 어머니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다음 날 응용력이 뛰어난 알피가 당당하게도 "김밥 잡아먹자"라고 해서 얼마나 웃겼는지.
"안녕히 계세요"와 "안녕히 가세요"를 헷갈리지 않고 쓰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사성이 밝아 씩씩하게 인사하는 건 좋은데 물건을 사고 나오면서 큰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하니 "직원들 좀 집에 그만 보내"라고 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통 알피가 틀리게 말하면 바로바로 고쳐주는 편이지만 귀여워서 일부러 그냥 두는 경우도 있다. 바로 그가 "하나밖에 안 힘들어"라고 말할 때이다. '하나 밖에'와 '하나도'를 헷갈리는 모양이라 처음엔 설명을 해줬다. 그런데 얼마 전에 차가 유난히 막혀서 지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집에 들어왔길래 "아이구 힘들었지?" 했더니 또 "하나밖에 안 힘들어" 하는 거다. "하나도 안힘든거겠지"라고 고쳐주려다가 문득 '그래.. 하나도 안 힘들리는 없지. 하나밖에 안 힘들다니 다행이네'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 남편 하나밖에 안 힘들구나~" 했더니 "그렇구나~"하고 대꾸해서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그 큰 눈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나밖에 안 힘들지?"하고 강요하듯 묻기도 하는데 "응, 하나밖에 안 힘들다" 하고 말하고 나면 정말 하나만큼만 힘든 기분이 들곤 한다. 또 자꾸 쓰다 보니 원래 있던 말 같은 착각도 든다.
우리의 한국 정착 과정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지만 꽤 괜찮기도 했다. 둘 다 언어가 통하는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볼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둘 다 그 나라의 외국인인 상태로 시작하느니 둘 중에 하나는 그 나라 국민인 게 초기 정착에 쉬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사실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팬데믹으로 그 난리가 나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배우자 비자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우리의 첫 신혼집은 수원 인계동의 작은 원룸 오피스텔이었다. 보증금은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매달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찾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신혼집은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원룸에서 시작하게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좀 새롭긴 했다.
그럼에도 일년 반의 원룸 생활을 생각해보면 부족한 게 하나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고마운 공간이었다. 손바닥만 한 주방에서 온갖 종류의 멕시칸 요리를 만들어내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먹을 때는 집 전체가 레스토랑이 되었고, 작은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볼 땐 영화관이 되어주었고,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차를 마시며 방 한가운데에 접이식 테이블의 날개를 활짝 펴서 마주 보고 글을 쓸 때는 우리만의 카페로 변신하곤 했다. 창문이 열리지 않던 크루즈에서의 캐빈에 비하면 이곳은 호텔 디렉터나 쓰는 스위트룸이나 다름없다며 눈이 오는 추운 날 창문을 활짝 열고 깔깔거리고, 원룸의 특성상 난방을 전혀 안 해도 아래위 옆집 덕분에 집안에 늘 온기가 도는 것에 감사해하며 침대에 꼭 붙어 앉아 각자의 책을 읽던 그때. 아마도 서로의 고됨을 숨기는 "하나도 안 힘들어"가 아닌 "하나밖에 안 힘들어"라고 말하며 웃어버리는 우리이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알피는 다시 새벽 5시 반 루틴을 시작할 것이고, 이제 제법 배가 동그랗게 나온 나도 최대한 편한 바지를 찾아 입고 출근을 할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와 스페인어가 제멋대로 섞인 우리만의 문장들로 우린 서로를 응원할 것이다.
각자의 자리가 즐겁길 바라면서. 너무 고되지 않길 바라면서. 조금 힘들어야 한다면 하나밖에 안 힘들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