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쓰여서
지금보다 날씬했고 피부는 매끄러웠고 해온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시절에 나는 군대에 있었다. 경기도라고 부르기도 강원도라고 말하기도 어정쩡한 곳에서 군 복무를 했다. 그래도 매주 펜으로 꾹꾹 눌러쓴 손편지를 보내주는 여자 친구가 있어서 군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매일 저녁 내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거는 수신자 부담 컬렉트콜도 잘 받아주는 친구였다. 군대 일과가 마감되면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내무실 청소까지 완벽하게 끝내야 고참들 눈치를 겨우 보면서 공중전화 박스에 줄을 서고 전화 한 통을 할 수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내 뒤로 늘어선 군 장병들의 따끔한 시선이 신경 쓰여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지루한 군대 일상이지만 전화기만 들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듣고 싶은 소식이 넘치는 게 군인이라는 신분이다. 언제나 전화를 받아주는 여자 친구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미안함은 휴가를 나와 갚아줄 수 있었다.
휴가에 맞춰 연차를 쓴 여자 친구는 내 손을 끌고 여의도로 향했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데 고양이 모래와 사료를 혼자 들고 갈 엄두가 안 놨다고 설명했다. 고양이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사람을 찾고 떠나버리는 이기적인 습성. 인기척 하나 없이 가만히 지켜보는 시선과 무심해 보이는 눈동자까지. 당시 고양이에 대한 인식은 이런 게 다였다.
"귀여운 강아지도 많은데... 왜 고양이야"
"그냥 따라오기나 해. 고양이 모래가 무거워"
이런 대화를 하며 고층빌딩 속 작은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여자 친구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고 복도에서 기다렸다.
회사원 차림의 한 사람이 고양이 한 마리를 들고나왔다. 계란 노른자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회색빛 털 뭉치가 웅크리고 있었다. 지브리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검댕이 같은 느낌의 은근히 정이 가는 놈이었다.
"꼬리가 꺾인 게 장애라서 사람들이 안 데리고 간다는데 나랑 닮은 거 같아서 더 좋아" 여자 친구는 고양이를 분양받으며 나에게 말했다. 캐리어 안을 자세히 보니 꼬리 끝이 기억 모양으로 꺾여있는 러시안블루 한 마리였다.
고양이 모래와 캐리어, 사료를 함께 받았다. 여자 친구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이 모든 걸 혼자서는 들고 갈 엄두가 안 나서 내 휴가일에 맞췄다고 연달아 말했다. 고양이 모래가 꽤 무거워서 몇 분 만에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집에 도착해 고양이 자리를 만들어주고 먹이를 챙긴 뒤 영화 '버팔로66'을 봤다. 남자 배우가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고 여자 배우는 그런 남자를 끝까지 받아주는 괴팍하고 불안한 연예 이야기였다.
신경질적인 영화가 TV에서 나오는 동안 꼬리가 꺾인 채 태어난 고양이가 방안을 어슬렁거렸다. 날이 어두워져 보석 같은 휴가도 하루 사라졌다. 군대 제대 후에 뭘 할지 딱히 견적도 나오지 않는 답 없는 인생이 우울한 마음을 더듬었다. 고양이는 꼬리가 꺾여있었고 여자 친구는 그런 고양이가 자기와 닮아 좋다고 말했다. 방안에 문제를 껴안은 모든 것들이 모여있었다.
인생에서 연애는 가끔은 으르렁거리고 질척거리며 울먹이며 자신도 몰랐던 밑바닥을 보여주고 이해를 받는 심리치료 같은 역할을 한다.
만남에서 완벽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불안해하고 문제가 있는 걸 알았을 때 좌절한다. 동시에 상대방의 문제를 발견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불안정한 인생을 인정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보낸다. 그날은 이런 시간을 보내기 완벽한 순간이었다.
인생에서 재미있는 일이 폭죽 터지듯 일어나는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은 비정상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런 기다림을 버텨 서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신화로 전해 내려오긴 하지만 신화는 언제나 날 비켜 지나갔다. 당연하게도 군 제대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군대를 제대하고 재미있게 때론 지루하게 시간을 보냈다. 많은 날이 흘러 이젠 헤어진 친구에게 고양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괜찮아 우리도 어차피 죽어"라고 답했다. 그 친구는 너다운 이야기라며 위로가 된다고 받아쳤다. 회색 고양이를 볼 때면 가끔 그 날이 기억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