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쓰여서
꽤 똑똑하고 대체로 멋대로면서 혼자 있는걸 즐기는 친구 S가 있다. 누군가에게 이 친구를 소개할 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 와타나베라던지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가 그린 만화 H2(야구 만화를 가장한 연애 만화)가 생각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S의 학창 시절 등수를 다시 한번 알게 되면 괜찮은 성적에 깜짝 놀란다. 각 잡고 공부하는 모습보다는 동네를 돌며 시간을 죽이는 장면을 훨씬 많이 봤는데 성적은 왜 그리 높은 건지 의아한 생각이 들고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와타나베나 H2가 수식어로 따라붙기는 힘들다.
S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의연한 태도와 작은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감성이 있다. 가볍게 지나가는 순간을 잡아 글로 남기는 재주도 있다. 비범한 사람은 대체로 그렇듯 S도 붓을 쉽게 꺾는 재주가 있다. 괜찮은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 다니기로 하고 발길을 끊었으며(물론 S만의 사정이 있긴 하다.) 어려운 취업난을 뚫고 들어간 직장에서 퇴사 통보를 때린 건 회사가 아니라 언제나 S였다. 혹시 S가 일을 못 한다고 추측한다면 그건 편견이다. 일터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동료들은 마음속 이야기를 S에게 털어놨다.
어린 시절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천재들이 왜 빨리 죽는지 아니? 세상 이치를 알게 되면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해 더는 알아야 할게 없으면 살아있을 이유도 없는 거 아닐까"라고 뜬금없는 말을 한 적 있다. S를 보면서 두고두고 이 말이 생각난다. 세상일에 무관심해 보이는 그가 어떤 일을 접었을 때 세상 이치를 한 개 더 알게 된 순간이였구나 짐작한다. 그래서 S의 모습이 부러울 때도 있다.
적당히 헌신하고 느슨하게 관심을 주고 때때로 열정을 보이는 게 S의 방식이다. 지인의 홈파티에 S와 함께 간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S는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 슬쩍 빠져 설거지를 했다. 이날 S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드라마나 시트콤 작가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꼭 하겠다는 다짐은 아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겠다는 얘기였다. 열정은 깔끔하게 도려내고 꿈에 대서만 나누는 대화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S에게는 이런 대화를 나누게 하는 비범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실제 작가가 되진 않았지만, 전 세계 영화와 드라마를 미친 듯이 봤다. 그 덕에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수 있게 됐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돈을 벌기도 했다. 미드를 보고 영어를 배우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이때 알았다.
집념이 없는 게 매력이던 S가 몇 년 전부터 야구에 빠졌다. 주말 새벽마다 사회인 야구를 뛰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시합에서 호수비를 펼치기 위해 평일 저녁에는 야구 연습을 챙긴다. 시합이 잡힌 전날에는 술자리를 피하고 당일날에는 동료들의 집을 돌며 기꺼이 카풀 서비스를 나서기도 한다.
야구와 관련된 자기관리만큼은 프로 선수답다. S는 야구와 친구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만큼은 여유롭고 진지해서 아직 덜 자란 소년 같은 모습이지만 화염에 비쳐 울렁거리는 그림자처럼 S의 삶도 종종 흔들렸다. 흔들림 속에서도 현명하게 평온을 찾는 모습에서 상실의 시대와 H2의 인물들과 겹친다. 책 속의 이들도 휘청 걸리는 삶에서 위안을 얻고 사람을 사귀며 성장해나갔다.
S의 흔들림과 평온 사이 어딘가에 내가 끼어있다. 같이 성장하며 꿈을 함께 이야기했고 나를 대신에 하고 싶은 삶을 살기도 했다. 혹시 S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사회인 야구 시합에서 호수비를 펼치는 외야수를 유심히 지켜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