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퍼튜니티 May 04. 2022

손 없는 여행객

마음이 쓰여서

사람들이 붐비지 않은 한가한 오후 시간대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가고 있었다. 초점 잃은 눈빛으로 멍하니 지하철 노선도를 바라보다가 바로 옆에 여행객 무리로 추정되는 여성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다들 화려하진 않지만, 개성 있는 코트나 재킷을 입고 정체성을 보여주는 아이템을 하나씩 착용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야구모자를 썼고 누구는 워커를 신는 식이었다. 패션업계 종사자들인가 싶었다. 여행객 무리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어폰에 흐르던 음악을 끊고 이들의 이야기를 살짝 엿들었다.


"아 일본인이구나"


4~5명의 이들은 신나는 일이 있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으며 일본어로 이야기했다. 그중 한 명이 전철 출입문의 경고 스티커를 가르치며 뭐라 뭐라 했다.


출입문에는 손장난(?)하면 손을 다칠 수 있다는 내용의 스티커가 있었다. 스티커를 보고 가장 신나게 이야기하는 여자는 손이 없었다.


회색 체크무늬가 있는 재킷을 입은 여자였다. 재킷 소매에 손을 감추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지만, 사람의 신체 구조상 그렇게 감쪽같이 손을 감추기 위해서는 마법이라도 부려야 했다.


그녀가 스티커에 그려진 제스처대로 계속해서 팔을 내리고 올렸지만, 오른쪽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손등 위로 약 5cm가량이 없었었다. 그녀가 팔을 쭉 뺐을 때는 어색하게 끊긴 팔의 마지막 부위가 매끄럽고 둥근 형태로 남겨져 있었다.


몸의 일부분이 훼손되면 숨기는 게 대부분이지만 이 여행객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의수를 착용한다든지 맨살이 안 보이게 옷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손이 없어서 어색한 오른팔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옛날에는 홍대 이리 카페 요즘은 을지로 어딘가의 간판 없는 바에서 만나볼 거 같은 스타일의 여자였다. 피부는 희고 머릿결은 부드러워 보였고 얼굴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장애가 장애물로 보이지 않았다.


언론과 방송이 반강제로 주입한 장애인의 이미지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았으며 의기소침과 거리가 멀었다. 밝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갔고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활용하는 영리함도 보였다. 몇 분 지켜본 거뿐이지만 그녀에 대한 알 수 없는 존경심이 생겼다.


몸은 작았고 체중은 가벼워 보였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몸의 반만 한 크기의 검은색 닉슨 브랜드의 가방을 들었다. 가방의 어깨 줄은 손이 없어 허전한 팔을 지나 어깨에 올랐고 가방을 멨다. 여행객 무리에서 그녀의 가방이 제일 컸다.


전철 문이 열려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어떤 신나는 일을 하러 한국에 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여행객 무리가 사라진 객실은 다시 평범해졌다.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손가락 마디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상처나 아픔이 생긴다. 모나지 않던 삶이 구겨지고 너저분해지면서 성장하는 게 생명체의 숙명이다.


눈물이 뚝 떨어질 정도로 아픈 상처(마음이든 신체든)는 주변의 관심과 시간으로 치유된다. 상처가 생길수록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내 상처는 타인의 상처를 알 수 있는 가늠쇠 역할을 해 위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장난을 칠 정도로 여유를 부리는 마음가짐은 쉽지 않다.


상처를 털어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날로 눈물로 보내야 하고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하고 좌절감에 새로운 일과 사람들을 못 만나기도 해야 한다. 끝나지 않는 상처의 시간이 흐를수록 수 없는 울음에 눈은 퉁퉁 부어 뭔가 제대로 해보기도 어렵다.


손 없는 여행객은 말로 이야기 못 한 험난한 시간을 보내서야 장난을 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픔을 이겨내는 마음은 경이롭다. 어느 봄 한가한 시간대 서울의 9호선 전철에 잠시 경이로움이 지나갔었다.

이전 06화 따뜻했던 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