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쓰여서
이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은 허다하다. 일이든 놀이이든 무엇인가에 열중하다가 눈을 돌려 시계를 보면 시침은 12시를 지나 1시를 향해 달려간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간만 확인하고 하던 일에 열중한다.
그러나 처음 밤을 새우던 날은 이러지 않았다. 엉망진창인 성적을 받아왔던 걸로 기억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어느 날. 숙제도 제대로 안 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무슨 일이 있든 내가 꼭 숙제를 다 끝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나의 졸음이나 숙면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린아이는 맘껏 먹고 충분히 자야 한다. 주로 밤 11시부터 아침 5시까지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성장 호르몬이 나오고 성장 호르몬은 뼈를 성장하게 만들고 손가락 마디와 다리뼈를 자라게 한다. 뼈가 자라면 키가 커진다. 현대사회에서 비율이 잘 맞는 몸매는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다.
영국 엑스터대학 티머시 프레일링 교수는 영국 바이오뱅크(생체은행)에서 수집한 12만명의 생체자료를 분석했고 키가 작은 남성의 평균 연봉이 약 190만원 적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국의 저명하신 교수님이 도대체 왜 이런 연구를 해서 잠이 부족해 키가 덜 큰 나를 더욱더 슬프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사례가 연구 결과를 뒷받침하긴 한다.
어쨌든, 부모님은 나의 키보다는 성적에 더 관심이 많았고 숙제하느라 밤을 새워야 했다. TV에서 9시 뉴스가 끝나가는 소리가 귓등으로 들릴 때까지도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빨리 끝내서 드라마를 보다가 잠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숙제는 끝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계가 11시를 향해 갈 때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밤 11시가 넘도록 깨어있다니 침대가 아닌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니.
12시를 넘겼을 땐 그저 억울했다. 살아생전 첫 밤을 새우게 된 이유가 여행이나 비디오 게임, 친구와 수다도 아니고 숙제라는 현실에 누가 말이라도 걸면 눈물이 콱하고 떨어질 정도였다.
12시를 갓 넘기고 숙제가 끝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배고프지 않냐며 옷을 입으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졸음을 참고 숙제를 끝낸 행동에 대한 작은 보상이었다.
처음 새벽에 거리를 나섰다. 심야 우동집이 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쌀쌀해진 밤 거리를 헤치고 거리를 걸어가자 저 멀리 반짝이는 우동집 간판이 보였다. 따듯해서 습기가 가득 찬 통유리 넘어 사람들이 그릇째 들고 우동을 먹고 있었다.
우동집 문은 들락날락하는 손님들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손님들은 끼니를 해결하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치, 돈, 일자리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어른스러운 우동집 분위기가 무서웠지만, 위장에 들어간 우동 면발과 국물은 몸을 데워줘 금방 위축된 마음을 풀어줬다.
심야 우동집에서 돌아가는 새벽의 시간은 빠르고 뜨거우면서 실용적이었다. 자리를 잡으면 우동이 나오고 허기를 채우면 다시 각자의 길로 떠나는 방식이었다.
"엄마 이렇게 새벽에 뭘 먹어도 돼요? 이 사람들은 다 잠을 안 자요?"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봤고 다음에도 숙제하다가 12시를 넘기면 또 오자고 했다. 이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은 허다하지만, 심야 우동집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