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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퍼튜니티 May 08. 2022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맛본 문명의 맛

마음이 쓰여서

시작은 충동적이었다. 다음 지도로 경로를 찍어보고 대충의 교통편과 이동 시간만을 확인하고 짐을 꾸렸다.

뭐 여행지야 가면서 확인해도 충분하니깐 우선 김밥집에 가서 김밥 석 줄을 포장했다. 맥주 몇 캔을 살까 했지만, 집에서도 안 마시는 술을 뭐 거기까지 가서 마셔야 할까 하는 생각에 챙기지 않았다.


게으르다 보니 출발이 늦었다. 청평역에 떨어졌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다. 3월 초라지만 서늘해진 날씨에 옷의 지퍼를 올리고 표지판과 지도를 번갈아 보며 버스 터미널까지 걸어갔다. 서리산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 한 아저씨가 다 늦은 시간에 산행하려는 내 모습이 신기했는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상세하게 교통편을 알려줬다.


아저씨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동네로 들어간 후 다른 버스를 갈아타야지 서리산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버스는 시간이 늦어 이미 끊어졌을 것이라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연하리에 내리니 저녁 8시. 그곳에서 갈아타야 할 버스의 막차 시간도 8시였다.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연하리의 땅과 하늘은 어둠으로 가득 찼고 모텔 하나만 세상을 밝혀 길잡이 역할을 하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무작정 걷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야영지까지 5.8km 거리를 걸었다. 동네 강아지들이 '컹컹' 거리는 요란한 환영 인사를 들어야 했다. 거리는 점점 불빛 하나 없어 LED 후레쉬에 의지해 길을 찾아야만 했다. 텐트와 침낭, 먹을거리가 들어 있는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눌러 피로도는 금세 쌓였다.


겨우 잣나무로 가득한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 암흑이 가득했으며 사람 한 명 없었다. 야영하기 괜찮은 장소를 찾아 배낭을 집어 던지고 텐트를 쳤다. 온몸이 땀으로 졌었지만, 3월 초 산속의 밤은 생각보다 더 추웠다.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사람 말소리처럼 들려 다른 사람들이 비박을 온 지 착각했다. 하늘로 쭉쭉 뻗은 잣나무는 손전등을 움직이는 대로 길게 늘어나는 그림자를 만들며 나를 노려봤다.


당장 무섭기보다는 잠잘 곳에 도달했다는 기쁨과 텐트를 빨리 쳐야 한다는 목적이 의식을 지배했는지 군대에서 텐트를 치던 습관이 나왔다.


군대에서 3명이 좁게 잠잘 수 있는 알파벳 'A'형 모양의 텐트를 설치하고 철수하는 훈련을 시도때도 없이 했다. 연병장에서 하기도 하고 야영지나 산속에서도 하는 식이었다. 이런 훈련은 밤에도 종종 했었는데 새삼스럽게 그 시절 짜증 났던 훈련이 지금만은 고맙게 느껴졌다.


텐트를 다 설치하고 차갑게 식은 김밥으로 허기를 달랬다. 배가 불렀고 누울 공간도 생기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고 덜컥 겁이 났다. 분명 사람이 없었는데 아까 들렸던 말소리가 뭐였는지 정말 계곡에서 나는 소리인지 궁금해졌고 산짐승의 발자국과 울음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 심지어 무수히 많은 잣나무만으로 나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숲이란 이렇게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위대한 장소다.


인간은 신비롭게도 무서운 순간 소변이 마렵다. 나도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겁은 많아서 해가 뜰 때까지 소변을 참기로 하고 침낭 안으로 몸을 숨기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추워지는 날씨에 한 시간마다 일어나 옷을 껴입으며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

저 멀리 있는 군부대에서 군가 소리가 들려와 아침을 알려줬다. 이곳도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시계는 새벽 6시를 가리켰다. 해가 뜨고 주위를 들려보니 아토피와 천식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다량으로 분비하는 평범한 잣나무 숲일 뿐이었다. 밤에만 해도 잣나무들이 거대한 구렁이로 변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나를 내려다보는 무서운 곳이었다.


아침에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계획이었지만, 사람 살면서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의외로 좋은 컨디션에 무작정 산에 오르기로 했고 이 선택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재빨리 텐트를 정리하고 산행을 결심한 이유는 어딘가 있을 산악회 회원들의 산행을 피해서 조용히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산에 들어온 이후 사람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산 위로 올라갈수록 등산객의 발자국을 찾기 힘들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은 등산로도 사라지게 했다.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길은 짐승의 흔적이 대신했다. 고라니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선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을 오르고 등산로가 아닌 곳을 걸었다. 아이젠 없는 등산화로 산을 오르다 두어 번 미끄러졌다.

산 정상 부근에서 멀쩡해 보이는 등산로 하나를 찾았다. 등산로에는 커다란 바위 몇 개를 타고 올라야 했는데 바위 바깥쪽은 온통 벼랑이었고 바위는 얼음과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웠다.


쓸데없는 도전 욕구가 생을 단축하는 때도 있는데 내 인생에서 이때가 그 순간이었다. 이 바위를 꼭 넘어가고 싶었다. 설마 무슨 사고가 나겠냐는 태만한 생각을 가지고 엉금엉금 기어갔지만, 미끄러졌다.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더욱더 심하게 자빠졌다. 몸이 낭떠러지 쪽으로 떨어졌다. 양팔을 뻗어 나무뿌리를 잡고서야 떨어지는 몸을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직사각형의 반듯한 검정 물체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내 스마트폰이었다. 나도 이렇게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멍하게 했다. 나무뿌리를 잡고 한동안 버텼지만 사람 한 명을 볼 수 없었다. 만약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래서 뼈 몇 개 정도만 부러져 목숨이 붙어 있다 해도 스마트폰도 없는 나는 구조 요청도 할 수 없고 몇 주나 지나서야 숨이 끊어진 상태에서 우연히 발견될지 모른다는 상상에 눈앞이 캄캄했다.


혼신을 다해 나무뿌리 쪽으로 몸을 당겨 겨우 끔찍한 낭떠러지 초입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 정상에 오르는 것은 포기하고 스마트폰을 찾으려고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낭떠러지 밑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더 쉬워 보였다.


결국, 스마트폰을 포기하고 하산했다. 더 힘을 쏟다가는 산속에서 기절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햇빛이 밝게 뜨자 산에 있는 눈이 녹아 길들이 질척거리고 미끄러워졌고 내려오는 길에 대여섯 번은 넘어졌다. 사람도 없어 넘어진 상태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 갑자기 잘 찾아 먹지 않던 치맥(치킨과 맥주)가 간절하게 떠올랐다. 동네 가면 친구랑 먹기로 다짐했다. 웃긴 건 온몸이 힘들 때마다 치맥 생각이 난다는 거다. 치맥에는 음식 너머의 무엇인가 깃들어있는 게 분명한가 보다.


겨우 산에서 내려와 민가에 들어섰을 땐 신발이 다 젖어있었고 바지가 엉덩이 부근이 다 찢어져서 하얀 속살이 보인다는 걸 알았다. 우연히 뒷주머니를 손으로 찔러보다가 알게 됐다. 입고 있던 재킷을 허리춤에 묶었다.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는 길에 펜션들이 즐비했다. 그곳에서 커플로 추정되는 남녀들이 하나둘 나왔는데 나와는 너무나 다른 하룻밤을 보낸 그들에게 찢어진 바지를 보여줬다고 상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눈 떴을 때부터 배고픈 상태였다. 눈앞에 보이는 빵집에 들어가 빵 몇 개와 우유 하나를 사고선 선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문명의 맛이다. 난 살아 돌아왔고 집에 가면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야. 아! 그전에 따듯한 물에 샤워할 거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스마트폰을 알아보고 친구들에게 시간여행을 하고 온 거처럼 흥분해서 무용담을 뽐내야지"


빵이 들어가자 몇 가지 달콤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목숨이 위태로웠던 짧은 여행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너무 많이 우려먹어서 미안할 정도지만 낭떠러지 밑을 봤을 땐 죽으면 죽는 거지 싶었는데 치맥 생각이 딱 났다는 이야기 전개는 치맥 자리에서 빠질 수 없어서 여전히 그때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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