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퍼튜니티 Jun 01. 2022

시작하지 못한 여행

마음이 쓰여서

20세기 마지막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의대생 시절 로얄 엔필드에서 만든 오토바이를 타고 중남미 대륙 횡단 길을 떠난다. 길에서 만난 중남미 민중들의 삶은 억압받아 자유가 없었고 가난해서 끼니를 채우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여행 내내 그들의 고통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체의 가슴을 찔렸다.


체의 여행은 예상보다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천식이 있던 체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자유와 평등 혁명에 대해 고민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여행은 쿠바 혁명의 씨앗이 돼 그와 인류의 미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리고 나와 친구들의 인생 경로도 살짝 수정했다.


수능이 끝날 무렵 우리는 10대 시절과 다른 20대를 보내고 싶었다. 적당히 사명감이 있으면서 자유롭고 또 담대해 보이고 싶었다. 그런 삶을 보내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먼저 살아온 위인들의 평전을 읽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체 게바라와 전태일 평전을 돌려 읽으며 20대를 준비 했다.


평전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고 평등, 자유, 보편적 의지와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했다. 문제는 고민만 하는 데 있었다. 친구와 길거리에서 나누던 이야기는 술자리로 이어졌고 PC방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마시는 거로 마무리를 하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놀고 마시기 바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가 있었다. 언젠가 떠나기로 다짐했던 오토바이 여행이다. 마지막 보루는 20대가 다 끝나가는 시기에서야 꺼내게 됐다. 친구와 나 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토바이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을 떠나기로 했다. 부랴부랴 오토바이를 장만하고 2종 소형 면허증을 준비했다. 친구와 만나면 여행 이야기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길거리를 걷다가 오토바이만 보면 오토바이를 타고 속초까지 가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이야기를 했다.

근처 호프집에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이야기에 텐션이 높아졌고 2차 자리에선 러시아를 나오면 터키를 관통할지 북유럽으로 향할지 고민했다. 마지막으로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삼키고 아침 해가 뜨는 걸 보면서 여행을 스페인에서 끝낼지 아프리카로 내려갈지 고민했다.


우리는 유라시아 한가운데에서 오토바이가 퍼져서 난감할 때를 대비해 오토바이 정비 공부도 하는 꼼꼼함을 보였으며 혹시나 타지의 이성이 호감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걸어올 것을 대비해 러시아어를 배우는 적극성도 있었다. 구글맵으로 여행경로를 사전에 확인하는 치밀함도 가지고 있었고 유라시아 횡단 스폰서를 찾겠다며 기업들에 우리의 여행 계획을 알리는 소개서를 메일로 보내는 자본주의적 성향도 있었다.


모든 걸 가지고 있다 여긴 우리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용기가 없던 것이다. 우리의 치밀하고 꼼꼼한 횡단 계획에는 아무도 모르게 출발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거였지만 허술한 안보 정신으로 친구 어머니가 알게 됐고 어머니의 반대에 무릎을 꿇었다.


친구 어머니의 "정신 차리라"는 한 마디에 반항 한번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친구는 "유라시아 횡단은 잠시 뒤로 밀려났을 뿐 취소된 게 아니다"고 선언하고 취직에 성공해 회사에 다니고 연애를 하고 여전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면서도 잠시 미뤄진 유라시아 횡단 이야기를 꺼냈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길거리에서 시작해 편의점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전 10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맛본 문명의 맛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