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용마 Nov 04. 2018

오랜 시간 바인더를 쓴다는 것

여전히 꾹꾹 눌러가며 적는 경험이 좋다.

어제 모임이 끝나고, 곧바로 마일스톤 인터뷰를 다녀왔다. 직접 바인더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까지 하게 돼서 가죽과 색상, 잠금 방식, 가죽 덧댐, 링 두께, 각인 등을 차례대로 골랐다. 어떤 가죽이 좋은지 잘 모르지만, 마음에 드는 가죽을 고르니, 에르메스에서 사용하는 가죽이라고 한다. 잘 고른 것 같다.

가죽 - 에르메스 가죽
색상 - 브라운
잠금 방식 - 고무줄 잠금
가죽 덧댐 - ○
링 - 실버 16mm


가을은 역시 브라운이지. 해서 브라운을 고른 건 아니고, 에르메스 가죽은 현재 브라운 밖에 없었다. 잠금 방식은 선택한 고무줄 잠금 외에 뾰족 잠금, 둥근 잠금이 있는데 기존에 쓰던 방식이 편해 고무줄 잠금을 선택했다.



바인더가 완성되고 나서 원래 있던 바인더의 속지를 모두 꺼내 옮겼다. 요즘 웬만한 자료들은 디지털로 이관해서 바인더를 가볍게 들고 다니는 편인데, 그래서 가죽과 더불어 바인더 무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인더 링도 16mm를 선택했다. (완성되고 나서 기존 25mm와 무게를 비교해보니 훨씬 가볍다.)



원래 울산에 있던 마일스톤은 최근 9월에 서울 한성대입구 쪽으로 매장을 이사했다. 작년 8월, 여름휴가 때 마일스톤이 울산에 있을 때 한 번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위 글은 그때 티스토리에 남겼던 후기다.

 

그때 매장을 구경하다가 특이한 가죽이 있어서 물어봤더니 루이비통에서 쓰는 '에삐 가죽'이라고 했다. 그때는 에삐 가죽으로 만든 가죽 바인더가 출시 전이었는데, 오신 김에 바인더 하나 선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내가 보는 앞에서 직접 만들어주셨다.    

가공을 거쳐, 마지막으로 내 이름이 적힌 네임 태그를 붙이니 나만의 바인더가 완성되었다. 이 바인더는 2017년 8월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쓰던 바인더다. 혹여 흠집이 나지 않을까, 고무줄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우려 없이 1년 넘게 잘 사용했다.  


바인더가 아닌 다이어리였다면, 해가 바뀌면 다이어리는 올해의 시간을 차지한 것만으로 역할을 다하게 된다. 더 이상 기록되지 않고 가끔 과거 기록을 찾을 때 활용될 뿐이다. 학창 시절 오래 달리기 할 때면,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나면 내 역할이 끝나듯, 앞으로의 시간은 바통을 건네받은 새로운 다이어리가 이어받는다. 그러나 바인더라면 사용 못할 정도로 훼손되거나, 취향 문제로 더 이상 질리지 않는 한, 해가 바뀌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과거를 비우고, 현재를 더하는 것만으로 다시 '지금'을 기록하라는 새로운 역할이 부여된다.



올해 아직 두 달이 남았지만, 차곡차곡 내년을 준비 중이다. 마일스톤에서 구입한 2019년 월간계획 속지는 2018년 앞에 자리 잡고 있다. 올해 월간계획은 기록이 부진했지만 내년은 다시 열심히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오랜 시간 바인더를 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잘 쓰는 것'보다 '꾸준히 쓰는 것'이 중요하기에.

 

1월이 되면 누구나 알찬 1년을 꿈꾸지만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2월, 3월을 채 넘지 못한다.

가장 설레는 1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지 허용되는 달이다. 바로 전에 썼던 글 <인증은 최고의 습관이다>처럼 2019년을 꾸준히 기록하고 싶다면 주변 사람들과 함께 바인더를 써보는 건 어떨까. 의지를 쓰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따르지만 환경은 그보다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습관을 만들어준다. 내가 중심이 되든, 다른 사람이 중심이 되든 함께 한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꾸준히, 그리고 오랜 시간 걷게 된다. 같이의 가치는 크다.



TV 시청으로 하루 종일 일요일을 보내든, 늦잠을 자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늘의 실수는 내일이 되면 크기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다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머릿속으로 '다시는 안 해야지' 다짐하기보다, 기록을 통해 두 눈으로 그 실수를 직면하고, 또 직면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이 좀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게으름이 싫어 효율을 올리다보면, 때론 기록할 때 투입되는 시간이 아깝게 다가온다. 그러나 기록은 효과다.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효과가 더 크다면 그 자체로 가치 있다.  


필사 <무한화서>, 이성복

가끔은 두 눈이 아닌, 손으로 책을 읽어가며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어보자. 효율을 따진다면 '필사'는 가장 비효율적인 독서다. 그러나 많은 삶들이 굳이 비효율적인 독서를 고수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책 <태백산맥>은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16,500매에 달한다. 하지만 지금도 자신의 책상에서 조정래 선생님의 문체를 닮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필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특별전

모든 자료를 수집하는 맥시멀리스트에서 지금은 미니멀리스트로 나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수집을 좋아한다. 모든 영화 티켓을 모으지 않지만, 내 취향이 묻어나는 영화는 항상 들고 다니는 바인더에 차곡차곡 쌓는다.


편리함은 서피스에게, 편안함은 바인더로부터.


20대의 대부분을 시간을 함께 한 바인더는 내년이 되면 어느덧 8년째 쓰게 된다. 누구보다도 디지털에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아날로그를 좋아한다. 디지털은 편리함을 주지만, 아날로그를 사용할 때는 편안함을 느낀다. 잠시 정리가 필요할 때 카페에서 바인더를 펼치고 가장 좋아하는 펜으로 생각을 써내려 가다 보면 어느새 주변의 소음은 들리지 않고 '쓰는 행위'에만 집중하게 된다.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지만, 글자를 쓸 때면 오롯이 몰입해야만 틀리지 않고 제대로 쓸 수 있다. '느림'이 반드시 비효율적이지 않듯이, '빠름'이 반드시 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때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느림'이 더 많은 효과를 안겨다 준다. 효율을 중시했다면 불편한 바인더를 오랜 시간 쓰지 못했을 거다. 오히려 더 성능이 좋은, 더 기능이 많은 도구를 찾아 지금도 여전히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손이 아프더라도 꾹꾹 눌러가며 적는 경험이 좋다.




이전 07화 모든 기록은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