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써내려가며 고통을 읽는다.
여행을 다녀오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나면 꼭 생각을 리뷰로 남긴다. 그 자체만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것들을 통해 발생하는 생각을 흘러 보내면 그저 소비한다는 느낌이 강해서일까? 그렇다고 해서 흘러가는 생각들을 글로 꺼내기란 여간 쉬운 작업이 아니다. 생각을 남기겠다는 욕심은 곧 잘 쓰고자 하는 욕심으로 번져 내가 쳐놓은 덫에 스스로 걸린 꼴이 되어버린다.
리뷰를 좀 더 잘 써보고자 지난 11일부터 CGV 명동씨네라이브러리에서 리뷰의 정석(총 4주)을 듣는다. 지금 글을 쓰는 8월 21일 기준으로 2번을 들었고, 이제 2번 남았다. 퇴사를 하고 고즈넉한 생활을 하고 있어 강의가 있는 날이면 근처에 미리 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강의가 시작되는 30분 전, 퇴근 후 강의를 듣기 위해 부랴부랴 뛰어오시는 분들을 볼 수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만 하다. 내가 회사를 다닐 때는 강의는커녕 근처에서 열리는 시사회도 쉽사리 참석하지 못했다. 지금 넉넉한 건 난데, 왜 부러움도 나의 몫일까.
강의 첫날, CGV 씨네 라이브러리가 찍힌 필사 노트와 블랙윙 연필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강의를 듣기 위해 돈을 냈으니 선물이라기보다 지급이 맞을까. 극장에서 주최하는 강의라 영화 리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줄 알았는데 책에 대한 이야기도 밑반찬처럼 조금씩 언급이 되었다. 오랜만에 대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 다닐 때 이렇게 열심히 들었으면 전공이 조금 더 재밌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재밌는 전공이었으면 열심히 들었을까.
과제가 있었다. 4주 과정 동안 영화에 대한 리뷰 하나와 매주 연필로 글을 옮기는 필사 과제였다. 첫날은 황현산 작가의 책 <밤이 선생이다>에 나오는 '문학적인 것들'을 내 글자로 옮기는 과제였다. 평소에 펜으로 필사해서 펜으로 적을까 하다가, 그렇게 되면 연필을 나눠 준 이유가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금방 마음을 접었다. 연필을 커터칼로 깎을까, 연필깎이를 하나 구입할까 고민하다 예전에 커터칼로 깎아 쓴 기억이 났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라 다음 날 연필깎이를 하나 샀다. 생각보다 비싸다.
날카롭게 깎인 연필을 오른손에 쥐고 필사 노트에 글을 옮겨 적었다. 펜으로 적을 때면 잠시 멈추는 순간은 손이 아플 때였다. 연필은 펜과 달리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금세 날카로움이 무뎌진다. 다시 연필깎이를 들고 무뎌진 흑심을 세운다. 펜으로 필사를 할 때면 노트에 닿는 굵기가 일정해 언제 손이 아파 잠깐 멈췄는지 쉽게 알 수 없지만, 연필은 곳곳에 날카로움이 깃든 문장들이 있었다. 연필깎이를 들 때면 다음 적어야 할 문장을 두 눈으로 읽는다. 그런 문장에 날카로움이 있다.
다음 필사는 영화 <폭스 캐처>의 몇 개의 리뷰 중 마음에 드는 글을 옮기는 과제였다. 평소 좋아하는 김중혁 소설가의 리뷰를 골랐다. 필사를 할 때 몰입하는 기분이 좋아, 시간이 있을 때 좋아하는 문장을 옮기곤 했는데 한동안 필사를 하지 않았다. 잘못 생각했다. 시간이 있을 때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했어야 끊기지 않았을 텐데..
다행인 건, 지금이라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필사 과제를 끝내고 카페에서 틈틈이 시간을 만들어 이성복 시인의 책 <무한 화서>를 필사했다. 손이 아플 때마다 오는 고통을 참아내며 굳이 문장을 옮기는 까닭은 재밌어서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 책을 읽으며 작가의 문장에 감탄하고, 내가 옮긴 걸 보며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 사이에 글을 옮기며 손으로 한 번 더 읽으며 감탄한다.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체를 무시하는 거예요.
우리의 손은 언제나 진실을 말해요. 손을 신뢰하면서 가급적 신속히 쓰세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말하도록 해야 해요. 이게 안 되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복사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건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에요. 머릿속에 있는 걸 굳이 밖으로 꺼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성복 시인을 알게 된 건 다른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다. 작가들은 본인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이나 책을 본인의 책에 넣는다. 접점이 없는 작가들의 책을 읽을 때 유독 언급이 자주 되는 책이나 작가가 있다.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세 번이 넘어가면 도대체 어떤 작가길래, 무슨 책이길래. 이렇게 나를 자주 찾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복 시인이라는 이름 이전에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는 그의 글귀가 먼저 문을 두드렸다.
지금 시로 쓰려하는 대상에 손잡이를 달아주세요. 어느 위치에 달지 고민할 필요 없어요. 손 닿는 곳 어디에나 달 수 있는 게 손잡이예요.
뭐든지 잘 들여다보세요. 입가에 말라붙은 침 자국, 주방 환풍기에 달라붙은 기름때, 변기 앞에 떨어진 오줌 방울... 세상 모든 의미 없는 것들에게 의미를 되찾아주는 시인은 신이 버려둔 일을 대신하는 존재예요.
어떤 사람의 인생도 파란만장이에요. 그런데 기대했던 얘기가 재미없는 건 디테일이 빠져 있기 때문이에요. 에피소드를 무시하면 인생 전체를 무시하는 거예요. 디테일 없는 뻔한 알레고리를 사용하지 마세요. 그러면 이야기가 두 쪽 나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정분 있던 사람은 아닌 사람과 다르다 하지요. 내가 글로 써본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은 달라요. 대상은 기억 못해도, 내가 남긴 자국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영화와 시의 공통점은 우리에게 함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이다. 작가가 생각 없이 던진 미끼에 독자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것은 옳다. 이것은 그르다는 자체도 독자의 생각이지 작가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답을 알려주는 작품은 재미없다. 친절하지 않아야 친절하다. 계속 궁금함을 자아내야 혹시? 할 때 다시 한번 뒤돌아볼 수 있다.
글쓰기에서 과정은 결과보다 중요해요. 글이 주는 감동은 전달 방식에 있어요. 고통을 끝까지 고통 그대로 두세요. 너무 빨리 결론으로 가면 재미없어요.
다 보여주는 시는 쉽게 허락하는 시이고, 조만간 버림받게 돼요. 시는 숨어 있어야 해요. 시는 본래 알몸이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면 '남사스러운' 일이에요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게 무슨 사랑이겠어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지요. 그처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게 시가 아닐까 해요.
이성복 시인은 이우성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를 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엄마, 독자를 그 아이로 표현했다. 마지막에 있는 '글 쓰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독자는 못 본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해요'라는 말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그 말은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리뷰의 정석 강의를 들을 때 이다혜 기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글은 좋지만 꼭 표현해야 할 사실을 표현하지 않으면 독자는 그 글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두 귀로 들은 그 말은 무겁게 마음에 남았다. 집에 가는 길에 그동안 썼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들었던 그 말이 두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삶을 바꾸는 대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려는 게 글쓰기예요. 경상북도 속으로 대한민국이 쏙 빨려 들어가는 일은 글 쓰기를 통해 언제나 가능해요.
시의 중심은 자기 안에 있어요. 자기 방에 들어가는데, 쓸데없이 꾸미고 차려입지 마세요.
필사할 글을 반복해서 몇 번씩 읽어보고 필사할 것.
뜻이 되는 단위별로 생각해서 적으면 좋다.
필사할 때는 전체 글이 보이지 않는다. 단어나 글자에만 집중한다.
지난 날에는 어쩌면 당연한 이 말들을 지키지 않고 그저 베끼기만 급급했다. 베끼기는 쉽지만 손으로 읽기는 참 어렵다.
우리가 글을 쓰는 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위하여서예요. 글을 쓰면 반드시 자득하는 부분, 스스로 터득하는 부분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뭣하러 애꿎은 몸과 마음을 쥐어짜겠어요.
글 잘 쓴다고 자랑할 게 아니에요. 세상에서 자랑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얘기하는 게 글 쓰기예요
어떤 사람의 나쁜 점을 보면 좋은 점이 안 보여요. 하지만 좋은 점을 보면 나쁜 점도 같이 보여요. 작은 것을 보면 그 뒤에 큰 것이 안 보여요. 하지만 큰 것을 보면 그 안의 작은 것도 같이 보여요. 모든 게 선택의 문제예요. 우리가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선택의 결과예요.
보통 분량의 책 한 권을 읽는데 2시간 정도가 걸린다. 나눠 읽으면 시간은 조금 더 추가된다. 이번에 가장 느리게 읽었던 <무한 화서>는 매일 밤 자기 전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썼다. 그리고 카페에서 시간을 만들어 틈틈이 손으로 읽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려 한 권을 읽었다.
제 사무실엔 머리카락이 많이 떨어져 있어요. 여러분은 잠시 왔다 가지만 자신의 일부를 두고 왔다는 생각을 못하지요. 여러분은 그것들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저를 통해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어요.
창문을 경계로 이쪽과 저쪽이 생기는데, 저쪽으로 가려고 창문을 부수면 저쪽도 없어져요. 아무리 가까워도 끝내 닿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생각하면서 아직 설렘이 있다는 것, 그것을 저버리고 그냥 이 자리에 주저앉지는 않겠다느 것, 시적으로 산다는 건 그런 것 아닐까 해요.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딱 멈출 때 힘이 생겨요. 선악이 아니라 성숙과 미성숙이 있을 뿐이라 하지만 결국 자기 통제력의 문제겠지요. 죽을 때 누구나 속옷을 더럽히는 건 괄약근이 풀어지기 때문이라 해요. 예술 또한 괄약근의 문제가 아닐까 해요.
영화를 보고 좋은 감정과 수많은 생각이 들어도 글로 옮기기 쉽지 않은 것처럼, 책을 읽으며 문장에 감탄해도 손으로 옮기기는 참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적으면서 느낄 고통과 손으로 읽으며 소모될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고스란히 예측되기 때문이다. 감탄한 문장을 손으로 읽으면, 써 내려간 글자 위에 고통도 천천히 얹히게 된다. 그 순간에는 고통을 느끼며 손으로 읽었지만, 그 과정이 끝나면 손이 아닌 머리가 기억한다. 그리고 훗날 고통이 얹힌 그 문장을 다른 이름으로 꺼내 내 삶에 꾸역꾸역 소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