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그럼 황금 모자를 쓰려무나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오르려무나
높이 뛰오로를 수 있거들랑,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사랑하는 이여,
황금 모자 쓰고 높이 뚸어오르는 사랑하는 이여.
덩신을 차지해야겠어요!"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
미국의 꿈, 개츠비의 꿈
1920년대의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을 겪고 최대의 경제 부흥을 맛보게 된다. 그동안 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자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와 더불어 과학의 힘까지 더불어 미국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는 대공황이 이전까지의 미국의 모습이다. 절대적인 진리따위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변해 버린다.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이기는 삶, 개츠비의 모습은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개츠비가 돈을 불법적으로 벌어들여 부자가 된 것은 미국의 모습과 흡사하다. 개츠비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만, 개츠비의 삶은 공허하다. 이처럼 1920년대 미국 또한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어있던 것이다. 하지만 1920년대 미국과 개츠비와는 차이가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의 꿈은 부를 모으고 돈의 힘으로 모든 것을 바꾸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개츠비도 소설 속에서 돈의 힘을 빌리지만 그에게는 이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는 개츠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잃어 버린 이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비록, 현실에 눌려 살아간다고 하여도 꿈을 꾸고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와야 완성되는 파티
개츠비가 여는 파티는 너무나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개츠비가 여는 파티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개츠비라는 사람이 여는 파티라는 것으로 알고 개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개츠비는 주최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파티에 불러 놓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개츠비의 파티는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파티는 바로 데이지를 혼자만을 위한 파티이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이 화려한 파티 속에서 개츠비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하다. 개츠비에게 있어 진정한 파티는 아직도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파티의 주인공이 등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기다리는 것은 마치, 파티가 끝나고 버려진 오렌지 껍질들처럼 허망하며, 텅 빈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의 개츠비를 숨쉬게 하는 것, 비록 개츠비가 과거에 갇혀 있다고 하여도 그를 살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데이지이다.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는 하나의 이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을 꿈꾸며 살아간다. 모두가 이상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만약 이상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현실이 되어 버린다. 개츠비의 삶에서 데이지의 부재는 개츠비에게 생명력을 준다. 데이지를 자신이 소유할 수 없다는 현실은 개츠비에게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게 하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키며 이 욕망은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Can't repeat the past, Why of course you can!
I am going to fix everything just the way it was before.
개츠비가 끝없이 찾는 데이지는 과연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과거의 순수했던 데이지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개츠비는 너무나 이상적이고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 개츠비는 너무나 이상적인 남자이다. 더이상, 개츠비를 사랑했던 데이지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데이지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개츠비의 삶에서 지금의 데이지의 허물 아래 있는 순수한 데이지를 찾지 않는다면 개츠비가 살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현실의 벽은 개츠비에게 너무 높았던 것일까? 개츠비는 끝내 자신의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개츠비의 장례식에 데이지는 참석을 하지 않는다. 지금의 데이지는 더이상 개츠비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하지만 개츠비는 현실의 데이지가 변하였어도 영원히 그녀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녀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죽기 전까지도 그의 머리 속에서는 순수한 데이지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개츠비의 죽음으로 개츠비의 기억 속에서는 개츠비와 함께 사랑을 나누던 데이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현실에서는 비록, 둘의 사랑이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개츠비의 마음 속에서는 영원히 순수한 그녀가 살아 숨쉰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 자신을 던지는 것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랑을 할려면 개츠비처럼 사랑을 해야 한다고... 비록, 개츠비가 너무나 이상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진정하게 한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을까?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은 아름답고 젊지만,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젊음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조건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존재를 통째로 던저 버리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그 대상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나를 떠났다면, 기다리기도 해보면서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나온 개츠비처럼 데이지를 영원히 사랑하듯이, 우리가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하고 기다릴수는 없겠지만, 한번은 개츠비처럼 어떤 사람을 열렬하게 사랑해서 그 대상에게 자신을 던지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과거에 사랑하던 사람을 다시 만나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너무 바뀐 그 사람에게 실망을 하더라고, 그리고 그 사람을 언젠간 기억속에서 지우더라도... 그 사람을 기다린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다. 누군가를 끝없이 사랑했던 한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