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과 취침 시간, 먹는 음식 종류나 스타일, 청소와 집 정리의 방식, 평일과 주말을 보내는 방식 등, 아내와 나의 서로 다른 삶의 조각들이 때론 어긋나고 때론 맞물리며 작은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둘이 사는 생활과 루틴에 너무 익숙해 있지만 아이가 없는 부부나 독신 가정에서 흔히 그러듯, 아내와 나도 반려동물 입양에 대해 잠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다만 나는 어린 시절 만났던 한 강아지로 인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와 함께 지낸 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지만, 긴 시간의 무게를 남겼다. 아내는 아내대로 제대로 키울 여력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것에 대해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하지만 간혹 우리는 반려 동물과 함께 사는 삶과 생활에 대해 약간의 기대감 같은 것을 품기도 했다. 조금 용기를 갖고 충분히 숙고하고 공부하면 반려견을 잘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걱정과 기대 사이 적지 않은 책을 읽었다. 입양 준비 과정의 하나로, 새 식구를 들이는 처지에서 제대로 정신적/물질적 준비를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였다. 모든 앎의 과정이 그렇듯,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졌고, 모르는 것이 많을수록 내 무지와 부족함을 더 잘 보여줬다. 동물학 분야나 문화인류학적 분야의 책들, 또 반려견과 관련된 실용서 등 반려 동물과 관련된 책들을 반년 동안 틈나는 대로 읽었다. 좋은 책을 많이 만났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개를 기르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크지 않은 공동 주택에 살며, 전적으로 돌봐줄 수 있는 가족이 부재한 나와 아내가 개를 입양한다는 건, 거의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반려견과 잘 살아보겠다고 시작한 독서였지만 살 수 없게 한 독서가 된 셈이다. 많은 책들이 양육환경과 책임감을 반려동물과 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강조했다. 모두 지당한 말이지만 왠지 그것만으로 부족한 것 같았다. 나머지 무언가 하나가 꼭 필요한데, 그것을 알게 된 건 짧은 소설을 통해서다.
열 살 소년 찬성은 휴게소에서 일하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 아버지는 두 해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이제 찬성은 할머니와 둘이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습관처럼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하지만 찬성은 ‘용서’라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런 찬성에게 우연히 찾아온 친구가 있다. 그는 다름 아닌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진 늙은 개, ‘에반’. 물론 그 이름은 찬성이 붙여주었다. 할머니는 그 개를 집에 들이는 걸 못마땅해 하지만 찬성은 에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다. 찬성에게는 아빠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으니까. ‘인간 시계’로 이 년, 개들의 시간으로 십 년이 흘렀다. 찬성과 에반은 어느새 서로 가장 의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에반의 몸 여러 곳에 종양이 퍼졌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노견이라 ‘수술이 더 안 좋을 수도 있다’는 알쏭달쏭한 말만 한다. 찬성이 고통이 심해지는 에반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만 원이 필요하다. 다행히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찬성은 병원이 잠시 문을 닫은 새, 조금씩 그 돈을 써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 중고로 물려받은 스마트 폰에 유심도 끼우고 액정 보호필름도 붙여야 했다. ‘터닝메카드’ 캐릭터가 그려진 휴대폰 케이스도 구입하고 말았다. 다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충당하면 될 거 같았다. 그동안 에반이 조금만 더 버텨줄 것 같았다. 에반에게 쓸 돈이 조금씩 줄었지만 찬성은 ‘모든 게 합당하고 필요한 과정처럼 여겨’ 졌다. 에반의 죽음을 거드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간식을 사들고 집에 갔다. 그런데 에반이 없다. 찬성은 황급히 휴게소 쪽으로 갔다. 선홍색 피가 천천히 새어 나오는 불룩한 자루를 발견한다. 그리고 어떤 개가 자동차에 일부러 뛰어드는 것 같았다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찬성은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는 걸 느낀다. 그때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오른다.
김애란의 단편 소설, <노찬성과 에반>에는 많은 어휘가 사용되지만,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단어는 두 개다. ‘용서’와 ‘책임’이라는 두 단어. 이 두 단어는 유의어도 반의어도 아니지만, 삶에서 서로 관계 맺어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고 때론 책임을 지고 책임을 부과하기도 한다. 찬성은 에반을 만나면서 ‘책임’이라는 어휘가 삶 가운데에 들어왔다. 에반을 만나지 않았다면, 또 함께 지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그 말은 어린 찬성의 삶과 무관할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에반이라는 물리적이고 현실적 존재와 함께 추상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인 ‘책임’이라는 것이 찬성의 인생에 함께 들어와 지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찬성은 몰랐지만 실은 다른 어휘들도 함께 들어왔다.
에반을 키우기 위해 찬성에게 요구되는 건 무엇이었을까. 돈일까. 시간일까. 애정일까. 책임감일까. 그 모두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건 ‘슬픔’이다. 소설에 중요한 두 단어, ‘용서’와 ‘책임’이 관통하고 있지만, 그 두 단어 사이에 슬픔이라는 말이 놓여야 할 것 같다. 반려 동물을 키우는 것엔 슬픔이 요구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보다 훨씬 더 짧게 머물 수밖에 없는 동물과 함께 살 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건 슬픔, 혹은 슬픔에 대한 태도다. 반려인을 만나는 것과 가장 크고 중요한 차이는 그 점이다. 내가 반려동물을 입양할 땐 머지않아 다가 올 그의 질병과 고통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처럼 늙고 병들고 고통받고, 때론 힘겹게 죽는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더 빨리 늙고 병들고 죽는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거나 아이를 낳을 때, 그들이 우리보다 먼저 늙고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만나거나 출산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반려자나 자녀들은 나보다 더 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 만약 배우자나 자녀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미리 일고 있어도 우리는 그들을 맞이할 수 있을까. 자녀가 우리보다 세상을 먼저 떠날 걸 알면서도 흔쾌히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사람은 없다. 반려동물을 ‘가족’, ‘자녀’, ‘동생’처럼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반려동물 문화에서 ‘자녀’ 혹은 ‘형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 살 결심을 쉽게 할 수 있을까.
반려동물을 맞이한다는 건, 늙음과 죽음과 슬픔이 적힌 편지를 미리 받아 드는 일과 같다. 그 편지의 첫 문단엔 기쁨과 즐거움, 사랑이라는 단어가 적혀있겠지만 결국 마지막 문단엔 죽음과 슬픔의 말이 쓰인다. 먼저 세상을 떠난 존재는 세상에 남겨진 자에게 슬픔을 남긴다. 동시에 되돌릴 수 없는 미안함도 남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세상을 떠난 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충분히 책임을 다하며 그가 만족할 만큼 잘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남겨진 자는 세상을 떠난 자에게 언제나 미안하다. 그리고 언제나 후회한다. 반려 동물과 함께 주어진 ‘책임’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겨우 실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충분히 슬퍼하고 용서를 구할 준비가 되었을까. 혹은 그것이 준비가 가능한 것이기나 할까. 아직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