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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Oct 22. 2024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내와 내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어떤 합의를 본 건 아니다. 막연히 언젠가 낳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연애시절,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출산도 비출산도 당위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아내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떤 결정을 하게 된 동기나 계기가 하나 일 수 있어도 그 결정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힘은 한 가지 때문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결심하는 건 한 순간이어도 그 결심을 지속하는 것은 매 순간이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은 청소년 시절부터 막연히 가지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결혼과 출산이 내 삶과 거리를 좁혀오자 그 생각도 내게 바싹 다가왔다. 선명해진 생각의 테두리엔 아버지가 보여준 삶의 태도가 가장 크고 깊게 새겨 있었다. 아버지의 삶과 행적에 대해 상술할 생각은 없다. 이제는 노년 세대가 되어버린, 흔한 근대화 세대의 가(부)장일 뿐이었다. 생활비를 가져와 가족을 부양할 의지는 없지만 가부장의 권위는 지니고 싶던, 가족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했던, 그 시대에 비교적 흔한 남성이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 그런 남성들이 보편적인 아버지 상(想)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대단히 특이한 유형 또한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게 반면교사였다. 청소년 시절, 아버지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아버지의 즐거움이 어머니의 고통과 맞바꿔질 때마다, 아버지가 우리 삶에 남긴 것이 헤어날 수 없는 구멍이라고 느낄 때마다, 나는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버지'가 되지 않는 것이니까. 그건 실패할 수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몇 가지 부재를 얻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은 아이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여러 정체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었을, 아버지로 호명되는 정체성과 세계가 영원히 내게 부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아버지라는 정체성과 세계를 나는 경험할 수 없고, 나라는 존재가 또 다른 존재를 통해 확장되는 신비를 경험할 수 없다.


고등학생 때였다. 한 번은 아버지가 화를 내며, "네가 어디서 나온 줄 알아!"라며 훈계하셨다. 앞뒤 사건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평소에 우리(나와 형)에게 별로 화내시지 않았다. 실은 우리에게 화 낼 겨를이 없으셨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아내와 자녀랑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지루하거나 불편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가족구성원으로 마땅히 맺어야 할 행동 양식과 정서적 유대에 무심했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혼 낼 일도, 아버지에게 혼 날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얻은 것을 소중하게 여길 줄도 사랑할 줄도 몰랐다. 그저 자신만을 사랑했던 것일까. 


'네가 어디서 나온 줄 알아'라는 질문 아닌 질문이 한동안 내게 떠나지 않았다. 아마 아버지는 명확한 대답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았다. 당신의 유전자에서 내가 왔다고. 내 근원인 당신이기에 아무튼 자식인 넌 감사해야 마땅하다고. 어느 날, 다시 큰 '사고를 치고' 집에 들어온 아버지에게 반감을 드러낸 십 대의 내게, 아버지는 꼼짝할 수 없는 무기와 권위를 내세우고 싶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나라는 존재가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감사라는 감정은 보통 선의, 호의, 배려, 희생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나라는 존재를 위해 들인 품은 아주  '짧은 쾌감' 한 순간이었다. 감사하고 싶었지만, 한 개체의 짧은 쾌감에 왜 감사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로써 부재 한 가지가 더 생겼다. 감사할 수 있는 아버지의 부재가. 


사별 같은 근원적 부재는 대상을 그립게 만들지만,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인한 부재는 대상을 부인하게 만든다.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아버지(와 그의 삶)에 대해 숙고하게 했다. 그렇게 쌓여가는 여러 겹의 생각이 '아버지가 되는 일'을 더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근원적 부재가 아닌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아버지의 존재가 나를 두렵게 했다. 혹시나 내가 나도 모르게,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면 어쩌지, 그래서 내 아이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린 시절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느낀 혼돈과 절망과 고통을 나 아닌 다른 개체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해 어쩌면 아버지가 된 이들보다 더 많은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가족의 의미에 대해 꾸준히 질문을 던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그의 작품 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각별히 '아버지가 되는'일에 대해 차분히 보여주는 영화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치고 자존심이 강한 아빠 료타. 내성적이고 욕심이 없는 소심한 아들 케이타. 아빠는 자신의 기질과 닮지 않은 그런 아들이 어딘가 아쉽다. 그러다 알게 된다. 실은 케이타가 산부인과의 실수로 원래 자신의 아이와 뒤바뀐 다른 부부의 아이라는 것을,  자신의 친자는 지방 소도시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는 소박한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어렵게 만난 두 가정은 서로의 아이, 그러니까 사고가 아니었다면 본래 자신들의 자녀였을 아이와 얼마간 함께 지내보기로 한다. 일류 대학을 나와 성공한 건축가로 도쿄의 전망 좋은 고급 맨션에서 살고 있는 료타의 생각은 명확하다. 만약 아이들이 본래 부모에게 잘 적응해 생활할 수 있다면 애초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자신 인생의 최대 실수(혹은 실패)가 될지도 모를 남의 집 아이 케이타 대신, 자신의 유전자가 전해진 아이를 데려오면 자신의 유일한 오점을 바로 잡을 수 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아내 미도리는 확신이 없다. 자신의 몸으로 낳은 아이가 본래 자신의 아이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아이로 알고 6년간 키운 아이가 갑자기 다른 집 아이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배송된 상품을 교환하듯, 아이를 교환할 수 없다. 


두 가족은 시험 삼아 아이들을 친부모의 집에서 생활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료타의 유전 정보가 담겨 있는 류세이는 좋은 간식과 멋진 전망이 있는 집에서, 그리고 각종 생활 규칙은 있지만, 같이 놀아 줄 아빠와 동생은 없는 집에서 지내기가 힘들다. 결국 류세이는 가출을 하고 본래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엔 함께 놀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아빠와 동생이 있다. 케이타 역시 엄마 아빠가 없어 외롭지만 잘 놀아주는 친부 유다이와 식구들 때문에 조금씩 그 집에 적응해 간다. 료타는 가출한 친자 류세이를 다시 데려 오고 같이 놀아주기 위해 애쓰지만 류세이는 자신을 키워준 유다이의 집으로 다시 가고 싶다. 결국 료타와 미도리는 류세이를 유다이의 집에 보낸다. 그리고 다시 만난, 피는 전해주지 못했지만 6년간 함께 산 케이타를 데려오려고 한다. 하지만 상처받은 케이타는 료타를 보고 도망친다. 그리고 두 갈래 오솔길을 나란히 뛰던 아빠와 아들은 결국 한 길에서 만난다. 그 길 위에서 아빠는 울며 아이에게 한 번도 건네본 적 없는 사과와 진심 어린 포옹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의 책에서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며, 부모와 아이를 이어주는 것은 '피'가 아니라 '시간'이라고 말한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자격은 유전 정보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에 대해 자신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내어 주었는가에 있다. 아버지가 되는 일은 그런 것이다. 그 시간을 관통해야 아이에게 아버지의 '피'가 아닌 아버지의 '시간'이 흐르고, 그제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쉽게 얻지 못한다. 눈매와 목소리와 생활 습관 몇 가지가 자녀에게 전해질 수 있어도, 그 몇 개의 유전형질로 아버지라는 이름과 세상을 얻는 건 아니다. 아버지라는 세상을 살며 아버지는 아버지 역할에 실수할 수 있고, 때로 아버지라는 역할을 위해 옳지 못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제 몸과 연결된 아이를 고통스럽게 세상에 내어놓는 어머니는 사정이 또 다르다. 설사 자녀에게 무심한 어머니일지라도, 생물학적 '어미'는 최소한 우리를 열 달 동안 품고, 마침내 고통을 감내하며 출산한다. 아버지에겐 그런 시간이 없다. 그래서 다른 시간이 요구된다. '피'는 '짧은 쾌락'으로 전해줄 수 있지만, 아버지의 '시간'은 '긴 감당과 어떤 노력'이 요구된다. 아버지의 것이 전달된다면, 그건 따갑지만 포근했던 아버지의 수염과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서다. 


내 생물학적 아버지에게는 자녀가 있지만 그는 막상 아버지라는 세상에 거주해 본 경험이 없다. 나는 나대로 자녀가 없어서 아버지라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각자 다른 길을 걸었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부재를 경험하며 산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기로 했지만, 결국 나는 아버지가 되지 못한 아버지를 닮고만 셈이다. 다른 삶을 살아온 두 갈래 길 끝에서, 아버지의 부재와 내 부재가 서글프게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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