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거실에서 작은 전등 아래, 책을 읽다 만난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의 회화 <The Burden>. 흑백으로 인쇄된 페이지에 노란 전등이 비추고, 그림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빛 아래 부드러운 윤곽선을 드러냈다. 아무 생각 없이 한동안 보다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태블릿을 켜고 작품을 찾아보았다. 흑백 삽화에서 알 수 없던, 그림의 주된 배경이 황갈색이라는 것과 저 멀리 구름 사이에 보이는 맑은 하늘이 에메랄드빛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그림은 보다 분명하고 많은 정보를 주었지만 태블릿을 끄고 다시 흑백의 페이지를 오래 보았다. 흑백으로 인쇄된 도미에의 그림이 불러내는 것이 있어서였다. 그건 아직 컬러텔레비전이 나오기 전의 일이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이다. 세상마저 흑백은 아니었지만 흑백으로 남은 기억.
흐릿하게 처리된 배경의 높은 건물들. 거대한 건물과 벽 아래 뛰어가는 여인과 아이. 그림의 화각을 더 넓게 확대해 보아도 그들 곁에는, 그러니까 온 세상에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어떤 이유로 여인은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다급히 뛰어간다. 빨래하는 여인을 자주 그렸던 도미에의 다른 그림에 비추어보면, 여인이 들고 있는 짐은 빨랫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다급히 뛰고 있는 모습에서, 여인의 짐은 내겐 어린 시절 그 밤길에 짊어진 어머니의 것처럼 보인다. 여인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걸까. 보따리의 무게로 과하게 꺾인 여인의 오른팔, 그리고 거기에 힘겹게 걸린 커다란 짐을 강한 빛이 환히 비춘다.
풍자 화가였던 도미에. 그는 인물의 특징을 잡아내고 상황을 강조하는 방식을 알았다. 여인에게 다급히 떨어진 빛은 인공조명처럼, 뛰어가는 여인의 신체와 몸짓, 그리고 무거운 짐을 인상적으로 비춘다. 여인 옆의 아이는 그림자가 만든 어둠 속에 가려있다. 그런데 내게 그 빛이 강조하는 것이 여인이나 여인의 짐이라기보다 여인의 그림자에 갇힌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을 받고 있는 여인과 달리 아이는 여인의 그림자 안에 온전히 갇혀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엄마의 짐과 엄마 삶의 무게를 아이는 고스란히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딘가 멍하고 동글동글한 여인의 표정이 무구한 아이의 얼굴 같고, 그 아래 아이의 표정은 세상 풍파를 감내하는 어른 혹은 노인의 얼굴 같다. 단지 그늘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다. 아이의 얼굴이 엄마보다 어른의 얼굴처럼 보이는 건, 엄마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일까. '부담', '부하(負荷), 혹은 '짐을 지우다'라는 의미인 'bruden'은, 그러니까 저 삶의 무게는 우선 엄마의 것이지만, 저 밤길을 엄마 곁에서 함께 뛰고 있는 아이 것이기도 하다.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일 때다. 직업 군인이던 아버지가 여느 날처럼 늦게 들어온 날이었다. 가득 취해 집에 들어와도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어야 했던 아버지는 그날 밤도 식사 중이었다. 술에 취해 귀가한 요즘 남편이 하기에는 무모한 행동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런대로 용인되는 요구였는지, 어머니는 조용히 밥상을 내어 오셨다. 내어오며, 아내 된 자의 최소한의 어떤 권리라고 생각해서일까,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한마디 하셨다. 어머니에겐 매일 취해 들어오는 남편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아버지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취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소리치며 밥상을 엎으셨다. 형과 나는 이미 자다 깨서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낮은 계급의 군인이 제공받은 단칸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바탕 뒤엎고 소리치고 난 아버지는 대충 드러누워 그대로 잠들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뒤집어진 반찬 그릇과 반찬을 치우셨다. 걸레로 방바닥을 훔치고 있었지만 꼭 그 일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형이 어머니의 옷소매를 붙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도망가자고, 외할머니 집에 가자고.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에게서 나온 무기력한 말이 걸레를 들고 무력하게 고민하던 어머니를 움직였던 것일까. 어머니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는 나와 형에게 조용히 나오라는 손짓을 하셨다. 나는 말라죽은 거북의 등껍데기처럼 애처롭게 뒤집힌 플라스틱 그릇 사이를 피해 방을 나왔다.
날은 춥고 길은 어두웠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어른 걸음으로도 먼 길이었다. 제 기능을 못하는 가로등이 듬성듬성 놓여 있는 비포장 길이었다. 우리는 달빛으로 진흙탕을 피해 잰걸음으로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어머니는 한 손엔 보따리를 들고 다른 한 손엔 나를 잡고 걸었다. 발 빠른 형은 어머니 앞에서 간간히 뒤를 돌아보며 재촉하듯 달렸다. 후일, 어머니는 그날을 회상하며 말씀하셨다. 그 길이 너무 어둡고 길었어. 그 어두운 길에서 그 사람이 달려와 목덜미를 확 잡을 것 같았어. 나도 어머니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빨리 아빠를, 그가 누워 있는 그 방을, 그 길을, 그 어둠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날, 어머니 왼손에 들린 허름한 보따리와 오른손에 들린 나. 나는 어머니의 또 다른 짐이었다. 세상의 모든 자녀는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부모에게 짐이 된다. 부모가 자녀를 축복이라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자녀는 그 존재 자체로 부모의 삶에 바짝 붙어 있는 짐이다. 자녀가 커 가며 부모는 그 짐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지만 종종 끝끝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다. 다시 물릴 수 없는 짐. 물론, 애초에 나와는 무관한 물건이라는 듯 구석에 휙 던져두고 돌아서는 이도 있지만 대개 부모에게 자녀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짐이 된다. 스스로 기꺼이 맞이한.
부모 또한 자녀에게 짐이 된다. 세상 모든 부모는 좋든 싫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많든 적든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자녀에게 걷어낼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부모의 슬픔과 고통은 자녀의 슬픔과 고통이 되고 부모의 불행은 곧 아이의 불행이 된다. 어린 자녀에게 부모는 제 인생의 전부다. 부모의 삶에 아이는 그저 짐이 되어 딱 달라붙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아이는 아이대로 제 의지와 무관함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중이었다.
도미에의 그림에서 가장 오랫동안 눈길이 닿는 곳은 여인과 아이도 짐도 하늘도 아닌, 그것들이 모두 뭉쳐 하나가 된 그림자다. 도미에의 그림자에는 고된 어둠이 있다. 도미에의 그것을 닮은 그림자를 앞에 두고 우리는, 그날 밤 긴 골목을 서둘러 걸었다. 그날의 밤, 달빛, 골목길도 모두 사라졌지만, 그날의 기억과 이미지와 감정은 여태 남아있다. 가쁜 숨소리, 찬 공기와 어머니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달빛의 창백함과 어둠의 질감까지. 두꺼운 책에 인쇄된 흑백의 이미지가 불러낸 흑백의 밤, 흑백의 기억, 흑백의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