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기억이 몸에 온전히 남는 어떤 날이 있다,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 헸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있다. 나는 ‘그날’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그날’에서 이미 멀어진, 어둡고 긴 밤길을 뛰는 장면이다. 그 어두운 밤의 장면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형이 자신이 여덟 살 때라고 하니, 나는 다섯 살이었을 것이다. 그 장면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 것이다. 그 이전의 세상은 기억하려 해도 단 한순간도 떠올릴 수 없다. 기억할 수 없는 그곳은 내게 일종의 침묵이고 빈자리다.
빈자리로 남은 침묵의 날 중, 첫날은 다른 날들과 달리 '생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나는 그날 침묵하지 않았다. 세상의 낯선 빛과 사람들에 둘 쌓인 채 소리 내어 울었다. 이 세상은 열 달 동안 나를 에워싼 양수의 끈적끈적하고 어둡던 세상과 너무 달랐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좋든 싫든 이제 내가 부단히 감당하며 살아갈 세계였다. 성인이 될 때까지 대개 부모가 자녀의 생계를 감당하지만 모든 부모가 꼭 그런 건 아니다. 설사 부모가 자녀의 생계를 온전히 감당한다 해도 아이가 만나는 사람과 세상 모든 일을 감당할 수는 없다. 내가 마주한 세계, 내 삶, 나라는 존재 자체, 이것들은 내 선택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게 주어졌지만,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런 감당이 시작된 날 이후 십 년 동안 생일이라고 불리는 그날을, 어떤 축하를 받을만한 날이라거나 파티를 할 만한 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난 날에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거나 선물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생일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미역국 정도가 상에 올라왔다. 매일 먹는 밑반찬들과 함께 미역이 가득 담긴, 고기 대신 정체불명의 노란 기름이 가득 떠있는 미역국이 내가 태어난 날이라는 걸 애처롭게 기념했다. 다른 가족의 생일도 다르지 않았다. 생일이라는 기념일이 우리 집에선 대단한 사치 거나 아무 가치 없는 일, 둘 중 하나 거나 혹은 둘 다였다. 부모님은 아이들 생일이라고 뭔가를 딱히 챙겨주는 어른이 아니었고, 자녀들(나와 형)도 부모님 생일이라고 어떤 마음과 선물을 준비한 아이 또한 아니었다.
공휴일이나 일요일처럼 달력에 빨갛게 그려진 날도 아니고, 반만 휴일이었던 토요일 같은 파란 날도 아니고 , 그렇다고 완전히 평범한 흰 날도 아닌, 무채색 같은 이 생일에 어떤 색채가 부여된 건, 초등학교 3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난 후였다. 한 여자 아이가 자신의 생일에 나를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며, 작은 분홍빛 카드를 수줍게 내밀었다. 예상치 못한 초대에 나는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별일 아니라는 듯이 흔쾌히 응했다. 그 아이는 나 말고도 다른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 아이 두 명을 더 초대했다. 여자 아이들 셋이 앞줄에, 나와 다른 남자아이가 뒷줄에 앉아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그날을 기념하며 아직 남아 있다. 아이들의 외모가 모두 단정하고 깔끔했다. 손길이 많이 감직한 아이들의 머리와 옷매무새는 아이들의 형편을 쉽게 짐작케 했다. 사진 속의 나도 그들과 많이 다르지 않은 입성을 하고 있다. 꽤 형편이 좋은 집 아이 같다.
유년 시절 사진 속의 나는 옷차림이 꽤 단정한 편이다. 여러모로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옷과 머리가 지저분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가난하지만 깔끔하게 살고자 했던 어머니 덕분일 수 있고 어머니만큼 젊어 보이는 어머니보다 더 깔끔한 성격의 외할머니 덕분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가장 친한 친구 두어 명을 빼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우리 집 형편이 꽤 좋다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에게도 어린 시절 살던, 재래식 변소가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집이 실은 외할머니 집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80년대 서울 북동쪽에 서툴게 형성된 우리 동네가 그리 넉넉한 고장은 아니었지만, 잘 사는 집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어서, 동네에는 은행 지점장 딸도 있었고 방송국 직원의 아들도 있었고 병원이나 한의원 집 아이들도 있었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러 세간이 늘어진 마당이 딸린 단층집들이 작은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 골목 맞은편엔 조경수와 화분이 정성스럽게 가꿔진 마당을 보유한 이층 집들은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사이좋게 나란히 서있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단층집과 이층 집은 두 종류의 세계가 갈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아이들은 매끈히 나누어진 그 두 종류의 집들과 달리 뒤섞여 무리 지어 자연스레 놀았다. 여러모로 척박한 사회일수록 부와 가난은 사실 어른들의 세계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더 냉정한 잣대 같은 것이 되곤 하지만, 그 동네는 전체적으로 가난해서일까, 그 동네 부자들 역시 가난한 그들에 기대어 살고 있기 때문일까, 가정 형편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잘 뒤섞여 놀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알았다. 부잣집 아이들은 가난한 집 아이들의 허름한 입성을 보고 대번에 자신들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난한 집 아이들 역시 반짝거릴 만큼 깨끗한 부잣집 아이들의 옷과 가방을 보고 자신들과 다른 부류의 아이라는 것을. 같은 시대, 같은 동네, 그리고 같은 학교를 공유한 아이들이지만, 재래식 변소에서 여전히 볼일을 보는 아이들의 세상과 좌식 양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는 아이들의 세상은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났다. 학기 초 그 아이에게 받은 분홍빛 초대장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여름엔 마당에서 목욕을 하고 형과 자리다툼하며 한 방에서 잠자는 내가 양변기에서 볼일을 보고 이층에 있는 자기만의 분홍색 방에서 책을 읽고 분홍색 잠옷을 입고 잠을 자는 아이에게 받은 최초의 것이었다.
그해 여름, 나도 생일 파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나를 초대한 아이와 가까운 친구들을 (만약 '파티'라는 걸 한다면)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얹혀살던 외할머니 집이 아주 허름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불러 어떤 '파티'를 할 만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 집은 그 아이 집처럼 이층 집도 아니고 '내 방'이라고 할 만한 공간도 없었다. 재래식 변소도 마당 한편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급히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하는 분홍빛 아이에게 당당히 안내해 줄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린 마음이지만, 우리 집에 없는 어떤 것들이, 우리 집에 있는 어떤 것들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집은 자녀 생일에 '파티'라는 이름을 붙이고 친구들을 위해 따로 음식과 간식을 마련해 줄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런 형편 때문에 생일 파티를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생일은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아이들이 친척집이나 시골 할머니 댁, 혹은 부모님과 산과 바다로 휴가를 떠날 시기와 일치했다. 어쩔 수 없이 친구를 초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면 별일 없는 내 생일의 하루가 그럭저럭 받아들일 만했다. 나를 초대했던 그 분홍빛 아이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엄마와 함께 시골 외할머니 댁에 갔다.
다른 해보다 유독 생일 파티를 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그 해 생일. 기름 뜬 미역국만이 내 생일임을 소박하게 지시할 뿐,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덥고 습한 하늘 가운데 뜨거운 태양이 고집스레 떠있는 날이었다. 모두가 어디론가 떠나 텅 빈 도시에 홀로 남겨지듯,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배경 삼아 눅눅한 마루에 누워 하릴없이 천장만 보고 있었다. 아침에 먹다 남은 노란 미역국이 점심에도, 그리고 저녁에도 살뜰하게 상에 올라오는 일을 차분히 경험할 뿐이었다. 간식이라곤 없는 집에서 유일하게 넉넉히 쌓아둔 빨간 토마토를 하루 종일 먹었다.
그해는 가뭄이었다. 유난히 토마토가 먹고 싶어서 토마토를 달고 살았던 그해 여름, 그녀는 임신중독증으로 발이 너무 부어 남자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주변에선 쌍둥이일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항상 집에 늦게 들어왔다. 대게 취해 있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자신의 삶과는 거의 무관한 존재일 텐데, 그는 둘째가 딸이기를 바랐다. 둘째는 그의 바람과 달리 아들이었고, 신생아 평균 몸무게 보다 훨씬 많아서 꽤 어렵게 세상으로 나왔다.
아이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세계에 대해 몰랐다. 실은 산모도 몰랐다. 아이의 탄생은 아이가 마주하고 살아가야 할 세계의 탄생이지만, 동시에 산모의 세계 또한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 살짜리 아이가 있는 산모의 삶에 또 다른 아이가 생겨나면서 종전과 다른 그녀의 세계가 태어났다. 세 살짜리 아이가 한 명인 세계와 사내아이가 한 명 더 있는 세계, 그 아이가 자라면서 그녀 자신과 관계 맺을 무수한 사건과 감정과 말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세계, 그렇게 그 아이가 없는 세계와 너무 다른 세계가 그녀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군데군데 금 간 곳이 많은 반들반들한 시멘트 바닥, 정사각형 모양의 작고 하얀 타일이 빼곡한 벽, 벽에 헐겁게 매달려 미지근한 바람을 내뱉는 벽걸이 선풍기, 앙상한 철제 침대, 그 위에 앙상하게 덮인 희고 깨끗한 천, 그 천을 비추는 밝고 선명한 하얀 조명, 그 조명에 반사되어 날카롭게 반짝이는 작은 도구들, 공간을 가득 매운 에탄올 냄새, 그것들이 둘러싸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산모도 간호사도 의사도 모두 땀을 흘리며 한 아이를 받아 내었다. 천장 아래 간신히 매달린 작은 창문에 여름해가 아직 머물러 있었다.
어린 시절과 달리, 내 생일이 어떤 ‘파티’를 하고 무엇인가를 기념하고 누군가에게 축하받을만한 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굳이 기념하거나 축하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허름한 이문동의 산부인과에 누워있던 어머니가 아닐까. 어머니는 내가 거주했던 가장 오래된 곳이자 최조의 공간이다. 내게 유일한 고향이 있다면 그건 어머니의 '몸’이다. 한때 내가 거주했던 작은 공간, 가장 작은 집. 내가 생을 마칠 날까지 어김없이 돌아올 날. 오늘 생일은 유난히 더운 여름날이다. 퇴근길, 어머니에게ᅠ전화하기 위해, 휴대폰을 드니ᅠ치과, 미용실, 카드회사, 안경점 등에서 온 생일 축하 메시지가 울려댄다. 두 세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