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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Nov 12. 2024

미술관 옆 동물원


몇 해 전 화창한 봄날의 일요일, 아내와 동물원 옆 미술관에 갔다. 어둡고 정적인 미술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우리는 맑고 청명한 하늘의 유혹에 이끌려 미술관 옆 동물원에 들어갔다. 아내나 나나 조금 꺼려졌지만 잠시 산책이나 하자는 마음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화창한 하늘 아래 음습한 동물원을 둘러보는 두 시간 남짓은 참혹과 무력함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동물원에서 빠르게 뛸 수 있는 모든 동물 중 누구도 뛰지 않았다/못했다. 멀리 비상할 수 있는 어떤 새도 날지 않았다/못했다. 모두들 약속한 듯 혹은 익숙한 듯,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졸고 있거나 무력하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감금/고립된 자들에게 흔히 부여되는 어떤 육체적 혹은 정신적 문제들을 모두들 한두 개씩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동물을 가둬놓은 철망에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물 캐릭터가 그려진 각종 안내문이 걸려있었다. 거기에는 동물들의 건강과 멸종 위기에 대해 염려를 표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럴수록 우리의 깊숙이 감춰진 어떤 범죄를 가리려는 노력처럼 느껴졌다. 동물원에서 주장하는 것, 가령 종의 보호와 연구적 가치, 교육적 가치는 실은 상업적 가치와 오락적 가치, 그리고 무엇보다 종 지배적 가치를 숨기기 위해 위태롭고 허약한 자기주장 위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진정으로 멸종위기종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대중에게 공개되거나 전시되지 않는 동물연구소를 (이미 몇몇 존재하는 곳처럼) 통해 종을 연구‧보호하고 다시 자연에 보내줘야 할 일이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동물원(의 개념)은 19세기 제국주의와 함께 생겨났다. 인간과 동물이 맺던 오랜 관계(500만 년 이상)가 고작 백 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동안 동물은 인간의 수단, 도구, 각종 (식)재료 이전에 어떤 영적(교감의) 대상이었다. 차라리 그들은 신이었다. 시선/응시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뀐 19세기 이후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아니,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새롭게 생겨났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가르치고 정복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정당한 일이었다. 자연을 어설프게 본떠 만든 좁은 공간에 입장료를 받고 동물들을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사고와 인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그건 그만큼 우리는 19세기적 사고에 익숙해서다. 동물원은 그 19세기적 시선이 물질화되어 표현된 셈이다. 


대부분의 대형 포유류는 인간과 똑같은 방식은 아닐지라도 상황을 인식하고 지금을 사고하고 때론 과거의 것을 기억한다. 종종 거울 속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도 안다. 유리벽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저 과묵한 수사자도 모를 리 없었다. 대개 사자들은 관람객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는데, 그날 만난 그는 관람객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을 보는 나를 보는가 싶었는데 나를 너머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무기력과 절망 사이의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일까. 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일까. 초점 없이 눈동자의 흔들림도 없이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단지 동물이라는 이유로 여기에 갇혀 있고 나는 유리벽 너머 그 앞에 서 있다. 


안타깝지만 동물원만큼(물론 대형 해양 포유류가 갇힌 수족관도) 폭력적이고 비교육적인 공간은 흔치 않다. 아이들은 동물원의 동물들과 어떤 교감도 나누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들이 소유한 동물 인형의 원본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지 못한다. 우리의 시선은 일방적이고 폐쇄적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종 지배적인 태도를 배우거나 19세기에 유행했던 제국주의적 시선을 체험할 뿐이다. 대개 동물들은 우리의 시선에 무심하다. 우리의 시선과 그들의 시선이 만나서 어떤 감응을 일으키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과 우리 사이엔 그런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와 교감하지 못하고 우리 역시 그들과 교감하기 힘들다. 


그들의 경이로운 삶의 방식을 짝사랑할 수도 없다. 초원을 질주하지도 먹이를 잡아먹지도 창공을 날아오르지도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몸을 뒤집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제 우리의 시선이 하나의 배경이 된 감옥에서, 그리고 어떤 먹이를 잡을 필요도 어떤 구애를 할 필요도 없는, 자연을 본떠 만든 키치적인 공간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남은 생애의 나날을 무력하게 보내고 있다. 이곳에서 수명이 길어졌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봄날 오후의 햇살을 가득 안은 채, 꽃을 피우고 새싹을 틔우는 나무들이 활기차 보였다.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오가며 느긋한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손가락처럼, 나들이 나온 사람들은 햇살과 나무그늘 사이를 걷고 있었다. 우리도 동물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었다. 동물원에서 진정한 의미의 동물은 만날 수 없었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참하게도, 실제지만 실재가 아니었고 실재를 대리하는 무력하고 우울한 동물적 상징 혹은 이미지였다. 살아있는, 하지만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 채, 우울증에 걸린 동물들은 머리를 흔들거나 불안하게 주위를 서성이거나 엎드려 있었다. 이 푸르고 아름다운 나무와 하늘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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