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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Nov 26. 2024

다락방과 편지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숨고 싶을 때가 있다.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무엇에 쫓겨서 혹은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일로부터 그저 숨고 싶을 때도 있다. 숨거나 도피하는 데 아무 이 유가 없을 수는 없지만, 굳이 숨을 필요가 없을 때조차 숨고 싶을 때가 있다. 다락방은 어린 내게 그런 곳이었다. 이제 보편적인 주거문화의 공간이 된 지금의 아파트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그곳.


수업을 마치고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아이들이 어디론가 가고 나면 나는 자리를 옮겨 동네 놀이터에서 또 다른 무리와 다시 한참을 놀았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고, 석양이 허름한 동네의 어수선한 지붕들을 고요히 덮어줄 때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갔다. 되도록 느릿느릿 걸어서 집 앞에 도착하면 대문에서 전해오는 느낌만으로 알 수 있었다. 집에 누가 있는지 또는 없는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서성거리지만 그래봤자 집에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마루와 방의 모든 불을 환하게 켰지만 집안에 남아있는 어둠이 온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방 한구석, 조금 늦을 거라는 엄마의 쪽지와 함께 차려 놓은 밥상이 미웠다. 밥상 위의 찬밥처럼, 기형도 시의 화자처럼 나도 차갑게 방에 담겨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6시, 7시,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고 심통이 난 나는 안방에 딸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목은 꽤 가팔랐다. 암벽을 오르듯 손으로 발판을 단단히 움켜쥐고 다리로 무게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스위치를 더듬거려 알전구를 켜면 사물에 묻어 있던 어둠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달아난 것은 어둠뿐 아니라 벌레나 쥐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불을 켜기 전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쿵쿵거리며 다락방에 올라갈 때 이미 달아났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사 지붕의 여백으로 생긴 공간인 다락은 지하실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일상에서 잠시 떠난 물건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두 공간은 비슷했다. 삶에서 소외된 사물이 한때의 영광과 초라함을 조용히 품고 잠들어 있는 다락과 창고. 지하창고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작은 창이 있는 다락은 밝음의 세계도 존재하는 곳이었다. 지하창고가 사물들의 습한 무덤 같은 곳이라면 다락은 적당히 건조하고 한산한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그 다락방에는 오래된 편지나 사진첩, 옷가지 등이 있었다. 다시 들춰보거나 꺼내 지 않을 테지만 버리거나 완전히 묻어두고 싶지는 않은 것들을 위한 공간 같았다.


집에 다른 식구들이 없을 때, 나는 종종 다락에 숨었다. 상인의 방문이 귀찮을 때, 종교인의 전도가 거슬릴 때, 이웃집 아줌마의 방문이 싫을 때 다락에 숨고는 했다. 이웃집 아줌마는 종종 집 안까지 들어오시고는 했다. 우리 집 열쇠를 가지고 있던 것인지 그 작은 키로 담을 넘으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때때로 마당까지 들어와서 우리의 이름(주로 형의 이름)을 부르시며 어머니를 찾으셨다. 가끔 현관문을 열고 마루로 들어오실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다락에 황급히 숨었다. 혼자 있다는 사실이 싫었고, 묻는 질문에 답하고 설명하는 것이 싫었다.


다락에는 더 이상 입지 않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옷가지들, 무언가를 숨겨 놓은 것 같은 박스들, 알 수 없는 문서와 서류를 묶어 놓은 종이 뭉치들이 있었다. 이곳은 산문적인 공간이었다. 가장 기억나는 사물은 결혼 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였다. 아버지의 필체는 부드럽고 깔끔했다. 직업 군인 시절 아버지가 쓴 편지에는 ‘보고 싶고 그립다’는 문장으로 대부분 채워있었다. 원래는 순백색이었을, 이제는 누렇게 변색된 편지지에 어머니 성함의 마지막 자를 간지러운 애칭으로 적으며, 아버지는 애정을 갈구했다. 삼사 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보낸 편지의 양은 꽤 많았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만 묶여 있는 걸로 봐서 어머니가 보관하다가 치워 놓으신 것 같았다. 버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잘 정리해서 서랍 어딘가에 보관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그 편지들은 다락에 보내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지금의 아버지를 미워하지만 한때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했던 과거의 아버지마저 미워하지는 않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쓰레기처럼 버린다는 게 어쩌다 보니 다락방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편지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토록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던 아버지는 맑은 정신에 두 발로 걸어서 집에 오면 어머니를 볼 기회가 매일 있는데, 왜 자주 외박하고 집에 자주 안 오는 걸까. 그나마 올 땐 왜 취한 채 오는 걸까. 혹시 어머니와 자주 싸우고, 매일 취하고, 종종 외박을 하는 이유가 혹시 어머니를 더욱 그리워하고 어머니를 갈망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을까.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아버지는 주로 친구들과 술을 그리워했다.


아무튼 당시 부모님의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 이미 경매에 넘어간 옛집의 등기부등본 같은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시간은 잘 갔다. 한때 사랑을 약속했던 이 옛 문서의 효능과 유효기간은 만료되었지만, 그리고 다시 갱신하기도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쓰인 이 편지는 내가 가져보지 못한 풍경과 기억과 사건을 품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찌 되었건 편지에는 ‘사랑’이라는 결정적 사태가 담겨 있었다. 만약 이 변색된 편지가 없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터였고, 그런 의미에서 이 편지 뭉치는 ‘나’라는 존재의 고고학적 증거물이었다.


나는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에 편지를 거의 주고받지 않았다. 이메일이 한창 보편화될 때라 종종 이메일을 보내곤 했다. 간혹 기념일이나 생일에 엽서나 카드를 주고받곤 했지만 장문의 편지를 서로 나누지 못했다. 아내와 만나기 전, 여자 친구들과 무수히 많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성인이 된 때부터 이메일이 보편화되었고 그 시기와 더불어 편지도 거의 주고받지 않게 되었다. 편지는 학창 시절 때까지 주고받았다. 그 오래된 편지들은 일부러 버리기도, 어쩌다 보니 버려지기도 했다. 내가 보낸 편지는 읽을 수 없어도 받은 편지들을 다시 읽어볼 수는 있었을 텐데, 모두 사라졌다. 편지의 물질성과 함께 편지를 쓴 그 시간들 모두. 혹은 누군가는 아직 간직하고 있을까. 그 오래된 것을.


내가 기억하는 편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받은 편지다. 종종 등교를 함께 하던 아이였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그 아이는 두 장으로 된 장문의 편지를 수줍게 건넸고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아이들이 달려들어 서로 편지를 보겠다며 잡아챘다. 편지는 순식간에 조각조각 찢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일은 어린아이들의 행동이지만 참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때 폭력적인 그들에게 화내기보다, 창피하고 당황한 나는 편지를 준 그 아이를 원망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그저 울기만 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아이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것 같다. 등교도 더 이상 같이 하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 이제는 만나도 전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할 그 아이를 만난다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찢긴 건 그 편지만이 아니라 그 아이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편지를 썼을 그 시간, 그러니까 온전히 자신이 아닌 타인과 함께한 그 시간도 찢긴 것이다. 만약 그 아이가 모바일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냈다면 그렇게 찢길 일도 없었을 텐데, 물질로 존재한 편지는 조각조각 찢겼다. 그 아이의 고심과 꾹꾹 눌러쓰던 그 작은 손과 연필이, 그리고 설레고 기대했던 작은 마음 모두가.


편지가 조각난 일은 슬프고 동시에 폭력적인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종이 편지였기에 조각날 수 있었던 그 사건은 이토록 시간이 지났어도 쉽게 잊지 못하는 기억이 되었다. 읽지 못한 장문의 편지. 내 책상의 책꽂이처럼 내 삶에 긴 편지꽂이가 있다면 그 맨 앞에 놓일 첫 편지. 이제는 다락방도 없고 편지도 없다. 나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아이는 경험했던 나와 함께 있었던 신비로운 시간,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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