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학교 정문 앞에서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내게 있다. 가로 10㎝ 정도 되는 작은 사진이다. 이 사진이 왜 내게 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집에는 더 오래된 사진도 있지만 이 사진은 칠십 년이 다 되어 가는 꽤 오래된 사진이다. 십 대의 절정기를 맞이한 여섯 명의 소녀들이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가방을 들고 같은 구두를 신고 거의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나란히 서 있다. 흰 양말의 길이마저 똑같다. 키도 거의 비슷한데, 그중 가장 작아 보이는 어머니가 가운데에 서 있다. 다들 웃고 있다. 몇몇은 살짝, 몇몇은 환하게.
여섯 명 모두 아무 말이 없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진의 이 특성 때문에 나는 사진을 좋아한다. 침묵, 말 없음, 수많은 영상 스트리밍의 수다로부터 나를 멀리 떨어뜨리는 어떤 마법이 여기에 있다. 동영상을 보지 않고는 살 수 없고 그렇게 살 필요도 없지만, 무수한 움직임 속에서 잠시 멈춰 있는 시간과 순간이 너무 적어졌다. 쉴 새 없이 제공되는 동영상 스트리밍과 쇼츠나 릴스와 달리 이 오래된 흑백 사진은 한 공간과 시간 속에 내 시선과 사색을 머무르게 한다.
사진은 단번에 70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사진 속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마치 이 낡은 흑백 사진이 티켓이라도 된 것처럼 가 보지 못한 시공간의 차원이 열린다. 한 여학교의 정문 앞으로, 여섯 명의 소녀 앞으로 흑백의 세상 속으로.
소녀들은 지금 할머니가 되었지만 사진 속에서는 여전히 고1 소녀다. 이 스틸 사진은 그 시공간을 훔쳐 영원히 멈추게 했다. 70년 전 별에서 출발한 빛의 일부가 소녀들에게 가닿고 거기에서 반사된 빛, 그러니까 소녀들이, 말 그대로 ‘발산’한 빛이라는 사물이 필름 표면을 직접 태웠다. 그 필름에 다시 빛을 통과해 다시 태운 종이를 나는 지금 보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눈에 보이거나 감각할 수 있는 ‘사물’로 이어진 것들이다. 소녀들에게 닿은 최초의 빛이 여러 시공간의 겹을 거쳐 지금 내 망막에 닿은 셈이다. 이 과정은 화학 물질의 도움을 받았지만 사물에서 사물로 투과되고 이어졌다. 여러 막과 겹은 거쳤지만 내가 과거 한 순간의 그 빛을, 그리고 그 빛에 반사된 소녀들의 눈과 옷을 ‘직접’ 본 것이다. 직접이란 말을 달리 말하면, 소녀들을 직접 감각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거의 모든 것이 동일한 여학생들의 모습에서 경직되고 억압적인 시대적/사회적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유일하게 드러내는 여학생들의 얼굴이 이 사진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 얼굴과 함께 이 사진에서 유일하게 특이한 ‘점(punktum)’이 있다. 모두가 단정하고 깨끗한 흰색 단화를 신고 있는데 어머니만 검정색 단화를 신고 있다. 이 사진은 어머니의 몇 안 되는 학창 시절 사진 중 하나여서 꽤 오래전부터 보았던 사진이다. 전에 보이지 않던 그 검정 단화가 이제야 내 시선에 들어온다. 어머니의 앳된 얼굴과 검정 단화가 70년의 시간을 넘어, 아니 거쳐 내 두 눈앞에 당도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고 비현실적이다.
왜 어머니만 검정 단화를 신었을까. 작은 사진에서 옷과 가방, 머리와 치마와 양말 길이마저 모두 같은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을 읽어 내기는 어렵지 않다. 신발만 예외 없을 리 없는데, 어머니의 검정 단화의 특이성에 어떤 사연이 있을 것 같다.
어쩌면 흰 단화든 검정 단화든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흰 단화와 함께 검정 단화도 신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신고 있는 걸로 봐서 복장 규정에 어긋난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머지 여학생 모두의 깨끗한 흰 단화와 어머니의 검정 단화는 대조된다. 이 검정 단화에서 어머니와 함께 이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는 두 살배기 딸(어머니)과 한 살배기 딸(이모)을 ‘남겨’ 받은 채, 갓 스무 살 즈음에 남편을 여의고 두 딸을 키우며 아흔 살까지 살아오셨다. 해방 후,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교원으로 일하시던 외할아버지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제자의 주례를 위해 무리하게 다녀오다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별다른 약도 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남편과의 두 해라는 짧은 시간을 보낸 후, 곧 가혹한 전쟁이 벌어질 세상에 자식 둘을 남겨 두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세상으로 떠났다. 스무 살 초반,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두 아이의 엄마는 해방과 전쟁과 피난을 고스란히 견디었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시절에 힘겹게 두 딸을 여학교에 보내고 공부시키며 살아야 했다.
그런 할머니가 어머니를, 그러니까 딸들을 살뜰히 챙겨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산업 현장에 나가거나 험한 돈벌이에 휩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운이 좋았던 시대였다. 할머니는 부모로서 책임감이 강했지만 미망인으로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없었다. 경제 활동 외에는 거의 모든 집안일을 큰딸(어머니)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검정 단화에서 불이 꺼지지 않게 애쓰며 갈아야 했던 연탄이 연상된다. 할머니가 사다 준 단화가 검은색이었지만 어머니는 받아들였다. 부지런히 빨아 신을 수 없는 검정 단화는 선생님에게 자주 지적받았을 것이다. 혼나는 것보다는 조금은 튀는 것이, 덜 예쁜 것이 나았다. 고등학생 정도의 다 큰 아이들은 그런 차이 가지고 놀리진 않았다.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그리고 학교에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대학을 진학했지만, 어머니는 원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학비도 매번 겨우 마련했고 매번 늦게 납부했는데, 대학 등록금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가난도, 돈을 달라고 말을 해야만 하는 학생의 처지도 모두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손주들에게는 그토록 다정하시던 할머니였지만 자식에게도 그런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종종 매몰차게 대하고 옆에서 자식(손주)들이 지켜보기에 무안할 정도로 싸우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스무 살에 결혼하자마자 곧 미망인이 되어서 두 딸을 키운 할머니는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딸들에게도 가혹했던 것이다. 특히 큰딸에게는 더욱더. 어머니는 따스한 사랑의 한마디 말도 들어 보지 못하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결혼하고 나서도 어려운 형편 때문에 큰딸 역할도 제대로 못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고된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 모든 것들이 어머니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생전에 외할머니는 일흔이 훌쩍 넘은 이미 할머니가 된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하시곤 했다. 하지만 소녀 시절처럼, 그 잔소리를 그냥 들어 줄 리 없는 할머니(어머니)는 더 연로한 할머니(외할머니)에게 자주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언젠가 어머니는 지나가는 말로 ‘나에게는 어머니가 시어머니였다’고 말씀하셨지만,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돌봐야 하는 일도 결국 큰딸 몫이었다.
마치 사진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의 검정 단화. 그 단화를 단단히 신은 소녀는 아직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이 소녀의 몸엔 아직 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소녀의 삶을 알고 있는 내 시선으로 봐서일까. 소녀의 얼굴 표정이 어딘가 슬퍼 보인다. 살짝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존재가, 훗날 아들이라고 불릴 그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을 그가 오랫동안 자신을 보고 어떤 상념과 슬픔에 빠질 것을 예감한 듯, 어머니의 표정은 왠지 슬퍼 보인다.
전쟁과 피난의 가혹한 시대적 상황을 경험한 유년 시절, 아버지가 부재한 편모슬하에서 자란 청소년 시절, 반려자거나 아이들 아버지였던 적 없는 남편과 살던 중년 시절, 자주 싸우거나 무뚝뚝한 아들들을 곁에 둔 노년 시절, 평생 행복의 크기보다 불행의 크기가 훨씬 더 컸다고 감히 말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삶. 어머니는 그 삶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얼마 전에 검정 단화에 대해 물었다. 아직 물을 수 있는 것을, 물으면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들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묻고 싶었다. 평생 처음 건네 본 질문이었다.
“어머니, 행복하세요?”
어머니는 말없이 웃으셨다. 그러고는 조금 늦게 대답하셨다.
‘그래, 행복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