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아무하고나 하는 것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결혼을 꼭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사랑이 결혼이라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생성·발전되는 감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성·결혼(제도)이 삼위일체로 형성된 우리 시대에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사랑의 어떤 부분을 더듬어 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하면 결혼하는 것을 지당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사랑과 결혼은 대개 무관한 것들이었다. 둘의 관계는 한반도에선 고작 백여 년 전부터 형성된 관계고 서구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관계다. 어린 신랑이 가임기의 처녀와 결혼하던 우리 과거의 풍습은 애초에 사랑과 결혼이 큰 관련 없는 두 항목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류의 오랜 기간, 다 큰 처녀와 총각이 만나더라도 결혼의 기준은 가문이나 혈통, 또는 번식을 위한 것이었지 사랑을 위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인류에게 더 익숙한 풍경은 낯선 두 남녀가 서로의 감정과 상관없이, 느닷없이 조우해서 결혼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사랑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대부분의 인류에게 이상적인 배우자의 기준은, 남자는 가족 공동체를 잘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 여자는 가족 공동체를 잘 불리고 돌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니까, ‘사랑과 결혼’이라는 고전적인 관계는 사실 고전적인 관계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랑, 성(애), 결혼은 성스러운 삼위일체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부부간의 사랑은 너무 어색한 일이었다. 황진이와 서경덕이 부부던가, 매창과 유희경이 부부던가,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부부던가, 윤심덕과 김우진이 부부던가. 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사랑을 했다. 부부 혹은 가족은 그 나름의 역할이 있었을 따름이고 사랑은 가족 밖에서 구해야 하는 무엇이었다(물론 지극한 부부애가 있었던 경우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리고 주로 남성이 가족 밖에서 사랑을 찾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욱 남성 질서의 사회였으니 말이다. 물론 가끔 (귀족) 여성도 가족 밖, 가령 준수한 젊은 장교나 건장한 돌쇠와 사랑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보바리 부인>의 엠마는 남성 질서의 사회에서, 남자들처럼 가족 밖의 사랑을 했기 때문에 비극적 파국을 맞게 된다.)
역사적으로 사랑과 결혼은 대개 무관한 것들이었다. 둘의 관계는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관계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모습에서 넘치는 사랑의 감정보다, 어떤 엄숙함과 정결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약간 배가 부른 신부는 2세를 품고 있는 것일까. 신랑의 표정은 근엄하기까지 하다. 인류에게 더 익숙한 풍경은 낯선 두 남녀가 서로의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그보다는 다른 어떤 조건들로 결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사랑과 결혼은 계열이 다른 두 항목이었다.
결국 지금까지, 사랑은 배우자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중세 귀족의 신분처럼 살기를 선망하는 재벌가(家)는 여전히 사랑과 관련 없는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제 경제적 능력, 또는 출산의 능력, 살림의 능력을 포함해, 느닷없이 ‘사랑’이라는 매우 모호하고 수상한 능력까지 겸해야 되었다. 예전에는 (먹을 것을 잘 가져오든, 아이를 잘 낳든) 비교적 명시적인 명쾌한 기준 한두 가지만 충족되면 되었는데, 이젠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어떤 것 까지 요구되고 충족되어야 하니, 점점 더 결혼이 어려운 무엇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그럭저럭 외모도 가꾸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짬짬이 독서로 교양도 높이고, 꼬박꼬박 세금 잘 내고 있는 내가, (그들도 경쟁이야 했겠지만) 그럭저럭 배우자(또는 교미 상대자)를 찾았던 인류 초기 호모 속(屬)들보다, 또 다들 제 나름의 짝이 있던 조선시대 양반댁 노비보다, 결혼하기가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점은 사실 이상한 아이러니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지요.’라는 말이 진실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혼의) 진실을 보장해 주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어쩌면 결혼은 (대개의 인류가 그랬듯이) 사랑과 무관한 건지도 모른다. 은희경 소설에서 “결혼은 아무 하고나 하는 거야”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진실이다.
나는 ‘엄마는 내가 아무하고든 결혼만 했으면 싶은 거냐’고 대들었다. 언니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결혼은 아무하고나 하는 거야.”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두 사람 각자의 계산은 모두 끝난다. 합산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할 일이 이제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일이다.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감정이란 변하고 사라지는 거야. 결혼은 변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는 게 좋아.
언니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겠지. 사람이란 다 다르니까. 언니는 다시 교양 있고 무관심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 은희경, <연미와 유미>
그렇다. 결혼은 애초에 아무하고 했던 것이다. 물론 이때 ‘아무’라는 것이 ‘막’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언니가 ‘변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결정하라는 말은, 결혼을 ‘막’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허약한 감정에 기대 결혼하는 것만이 꼭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낭만주의적 결혼/사랑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어느 날, 눈이 번쩍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일단 결혼에 성공하면 그저 행복하게 살 거라는,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 말 그대로 어떤 환상, 그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렇게 판타지를 가지고 결혼한 그들/우리들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에서 판타지가 점점 제거된다. 그리고 어느 날 남는 건, 지리멸렬한 ‘생활’ 그 자체. 그러면, 또 누군가는 ‘사랑’ 따위는 없다며 냉소적으로 ‘생활’만이 전부라고 말한다. 즉, 한때의 낭만주의적 사랑의 전사가 어느 날 냉소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어 귀환한다. 이 낭만주의자이자 동시에 현실주의자인 이들은 사실, 두 항목의 관계를 애초에 잘못 설정해 놓고 양 극단에서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이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부부간의 불화’, ‘불륜’, ‘이혼과 그것의 증가’라는 사회적 주제(문제)가 우리 시대에 중요해지는 것은 사랑과 결혼이라는 애초에 무관한 두 항목의 무리하게 연결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자거나, 결혼하면 안 된다는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랑하기 때문에 꼭 결혼해야 한다거나, 사랑이 없으면 결혼하지 못한다거나, 심지어 결혼하기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혼은 제도고, 사랑은 제도가 아니다. 제도와 제도 아닌 것을 필연적인 무엇처럼 연결하는 것에서 애초에 오류가 있었던 것.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의는, 단지 사랑은 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이라는 정의가 아닐까.
‘정말이지, 그이가 결혼하고 바뀌었어!’라고 우리는 종종 말한다. 그런데 사실, 결혼이 사랑의 완성, 혹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당한 말이다. 사랑을 위해 노력하던 연애 시절이 끝나고 ‘사랑을 완성/완결’한 ‘결혼’이라는 과정에 돌입했는데, 더 이상 무슨 사랑이 필요하겠는가. 모두 완성한 작품에 무엇을 덧칠할 필요가 있는가.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또 ‘결혼이 사랑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결혼하면 그 사랑이 멈춰야 마땅하다. 결혼은 사랑의 필수 불가결한 완성품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이라는 말, 이 말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결혼에 종속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혼에 기대지 않고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자만하지 않고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랑과 결혼이 애초에 큰 관련 없는 항목이라면, 사랑과 결혼 사이에 어떤 거리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도(함께 살아도) 여전히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중에 당신과 함께 살게(결혼) 되었을 뿐이지, 사랑의 결과로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당신과 결혼해도 당신에 대한 사랑이, 아직 사랑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맹세를 통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결혼이 서로 닿지 않는 거리(감)를 통해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그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그리고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가 닿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당신에 대한 사랑은 아직 사랑으로 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