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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Jun 16. 2016

‘사랑’이라는 동사

- 당신의 늙음을 마주하는 시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가, 우리가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더욱 중요하다.
- 미하엘 하네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 동어 반복적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사랑’일까. 물론 우리는 그 감정을 느끼기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만 우리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사랑은 감정일까. 어쩌면 사랑은 애초에 감정이 아닌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사랑을 감정으로 알고 있지만, 또 그 감정에서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랑은 감정, 혹은 마음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나 움직임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사랑’을 명사, 그것도 추상명사로 지시하니, 우리도 그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처음 당신을 좋아했던 것은 알고 보면,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보다 당신의 표정, 당신의 행동, 당신의 움직임이었다. 당신이 찡그리거나 웃을 때 그 얼굴이 좋았고 당신이 내게 한 말과 그 입 모양이 좋았고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좋았다. 대개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당신과 나를 둘러싼 동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추상명사로, 오롯한 감정으로만 알고 배우고 인식한다. 하지만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가 아니었을까.


사랑을 명사, 그것도 추상명사로 이해하기보다는 동사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동사형’ 사랑을 그린 감독이 있다. 우리에게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진 하네케 감독. “관객을 고문(rape)하는 감독”이라는 그는 일련의 작품들(퍼니 게임, 하얀 리본 등)을 통해 차갑고 냉철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가 말하는 ‘아무르(사랑)’에 대한 인식도 다른 작품과 다르지 않다.


영화 <아무르>는 늙음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어떤 모습을 보여준다. 여든의 노부부 조르주와 안나의 삶과 사랑, 혹은 죽음에 대한 이 영화의 서사는 간단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안나의 병. 수술을 하지만 좋지 않은 결과로 안나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결국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그 모든 것을 그녀는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남편 조르주가 옆에서 간병해주지만, 고령인 그의 몸 상태도 그리 썩 좋은 편이 아니기에 수월하지 않다. 안느는 음악가였다. 그녀는 과시적으로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프랑스 여느 예술가 중산층과 같이 평온함과 차분함, 그리고 절제된 교양 속에서 무난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무난하고 평온했던 삶을 흔드는 건,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치의 병과 죽음이다.


대담하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아무르(Amour)’라는 제목을 단 이유는 이들 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그런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장 감독은 작정하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여러분, 보시오. 사랑은 이런 겁니다. 대소변을 받아 내야 되고 서로 추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봐야 되고,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 그런 게 사랑입니다.’라고 말이다. ‘사랑’이라는 제목을 통해 우리가 흔히 떠오르는 그런 상념, 생각들을 감독은 보여주지 않는다. 감독은 (눈이 멀어) 사랑의 환상(무대)만을 보는 우리들에게 그 이면을, 사랑의 무대가 아닌 사랑의 현실(객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초반, 안느의 제자 피아니스트(그는 실제 영화의 OST를 연주한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다) 연주회 장면에서 화면은 연주 무대가 아닌 객석을 긴 테이크로 담았던 게 아닐까.


(서구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겠지만) 자식은 자식일 뿐.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연과 사정과 생활이 있다. 그들의 참견, 그들의 걱정, 그들의 잔소리, 그들의 조언, 그 모든 것은 외부적 참견일 뿐, 노부부의 늙음과 죽음을 그들이 온전히 짊어질 수 없다. 병, 고통, 늙음, 죽음을 짊어져야 하는 건 당사자 또는 그 늙은 반려자의 몫. 안느는 사진첩을 보며 인생이 참 길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녀의 말과는 달리 인생은 사진첩 몇 권으로 정리될 만큼 참 짧고 보잘 것 없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길다고 말하고 싶은 건, 늙어 가는 것과 죽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점점 추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안느.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떠나고 싶은 안느. 그래서 ‘물 마시기’를 거부하는 그녀.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려다 말을 듣지 않는 그녀의 뺨을 때리는 늙은 남편 조르주. 병病과 늙음, 이 모든 것들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들을 변하게 만든다.


“나를 다시는 병원에 보내지 마”라며 병석에서 괴로워하는 안느. 이제 얼마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를 달래 주며 조르주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했던 초등학교 캠프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그때 그 캠프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 다시 늙음과 죽음이라는 캠프에 갇힌 안나와 조르주. 이야기를 다 마친 조르주는 가만히 듣고 있는 안나를 위해 그의 방식대로, (얼마 남지 않았지만 길게만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그러니까 그들의 낡은/늙은 캠프에서 그녀를 벗어나게 해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을 거부하고 죽음을 원하는 안느에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며 따귀를 때리는 조르주의 행위는 사랑일까 폭력일까. 삶이 고통스러운 안느를 베개로 질식사시킨 조르주의 행동은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살인일까. 사법적, 종교적 판단은 쉽고 명확하게 어떤 결론을 내릴지 모르지만 그러한 삶에 맞닥뜨린 사람들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쉽게 내릴 수 있을까.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는 조르주. 그 베개 아래에서 힘없이 파닥이다 고요해지는 안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행동. 이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이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하고 차갑다. 그는 누군가 사랑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오히려 사랑은 때론 잔혹한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네케 감독은 이 말도 덧붙인다. 사랑은 ‘감정’인 ‘무엇‘으로 그칠 수 없다는 것. 사랑은 결국 행위, 행동으로 해야만 하는 '무엇'이라는 것을 말이다. 당신의 고통을 온전히 알 수 없지만 최대한 그 고통에 감응하며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그 이해에 상응하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느를 베개로 질식사시킨 조르주의 행동은 안느의 고통을 진정을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해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 이 차가운 사실을 하네케 감독이 포장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드러내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 삶과 사랑이 견디고 통과해야 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사랑은 (환상적인) 무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객석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토록 무서운 책임감을 갖고 시작하는 일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일은 쉽지만, 그러니까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이끌리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지만, 그 이끌린 순간의 감정을 지속하며 함께 살아가는 일은 사실 힘든 일이다. 즐거운 일과 힘든 일이 교차되며 삶이라는 직물이 직조되듯, 사랑도 기쁨과 고통으로 직조된, 완성되지 않는 또 다른 직물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직조하는 일은 명사가 하는 일이 아니라 동사가 하는 일이다.


미하엘 하네케, 아무르, 2012

당신의 추한 주름을, 흉한 우리의 늙음을 마주하는 시간. 그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부단히 노력한 '동사형' 사랑을 통해 나는 당신의 추한 늙음과 주름을 마주할, 그 아름다운 순간의 권리를 그제야 얻게 된다.  


훗날 언젠가, 만약 주름 가득한 당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저 ‘사랑’이라는 명사에 충실했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명사에만 충실했다면,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 당신은 나를 떠나거나 나는 당신을 떠났어야 했다. 당신의 주름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그리고 당신의 늙음을 대면하는 시간이 내게 주어진 것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상대의 기쁨과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위해 동사형 ‘사랑’을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름과 늙음이 주어진 것일 테다. 그래서 당신의 주름과 늙음은 슬프지만, 또 내 주름과 늙음은 당신에게 슬픔을 안겨줄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간 우리가 잘 사랑해왔다는 슬픈 기념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 ‘당신 참 예쁘다’고 말했던가?”


다른 이에게 추한 나의 주름과 당신의 주름이 우리에게 예쁠 수 있는 것은 아마 그 주름에 동사형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그것을 알 때 “오늘 밤에 ‘당신 참 예쁘다’고 말했던가?”라는 조르주의 대사처럼, 당신의 주름을 마주한 언젠가 그 낡은 밤에도 여전히 나는 당신에게 ‘당신 참 예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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