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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Jun 23. 2016

사랑의 초기값

- ‘오래된 미래’를 만드는 일

산다는 것은
하나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것

- 파트릭 모디아노가 인용한 르네 샤르의 문장


나와 그녀가 ‘특별한 관계’ 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일까. 세상의 수많은 존재자들 중에 단지 그녀만이 혹은 그만이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저 ‘그냥’이라고 대답하면 될까. 막연히 신비한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런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일까.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은 처음 보고 호감을 느꼈다는 의미이지 그 첫 눈길에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무엇이든 어떤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서적,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정서적, 물리적 시간을 통과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깊이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단 한 번 보고 사랑하는 감정에 빠질 수 있다(혹은 그런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과한 시간이 없는, 즉 깊이가 없는 빠짐은 쉽게 빠진 만큼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관계’, 즉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개 어떤 경험과 추억을 공유할 때 깊어진다. 말하자면 ‘특별한 관계’는 어떤 ‘역사성’에 기인한다.   


역사가 역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과거만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역사의 대상인 과거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그 과거를 사유하는) 현재의 시점(時點)이 있어야 하고 그 사유한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할 수 있어야, 우리는 그때 ‘역사’라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역사를 망각했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일을 잊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망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도 동시에 함의하고 있고, 그것은 제대로 된 미래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역사를 ‘만드는(기술하는)’ 일은 현재에 하는 일이지 과거에 하는 일이 아니다(과거는 당시에 현재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왜 이미 지나가고 사라진 과거를 연연하며 그것을 기록하고 정리하며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그런 우리의 태도/습속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 우리가 (과거는 알 수 있지만)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가 궁금하고 두려운 우리들은 (알 수 있는) 과거를 통해 미래에 어떤 확실성 또는 예측성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또한 그렇게 했을 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선취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지난 일을 통해 미래의 일을 소망하는 것, 더 강조해서 말하자면 과거가 없으면 미래는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의미 말이다. 그렇게  미래를 위해 매일매일 과거를 만드는 한 남자가 있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의 헨리 로스(아담 샌들러)가 바로 그다.


하와이에서 수의사로 일하는 그. 그는 휴양지라는 낭만적 환상을 이용해 그곳에서 수많은 여자들을 만난다. 화려한 언변과 재치로 수많은 여자를 만나지만 그녀들은 그에게 (그곳에 놀러 온 그녀들도) 단지 하룻밤의 사랑/사람일 뿐이다. 그 ‘하룻밤의 사랑’은 말 그대로 하룻밤만 유효한 것이어서 즐겁게 놀고 끝나면 그것으로 완결된 것이고 다시 다른 사랑/사람, 즉 ‘하룻밤의 사랑’을 만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문득 어느 한 여인, 루시(드류 베리모어)가 나타난다. 그들은 처음 만난 날 서로 호감을 가진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날 만난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낯선 사람으로 여긴다. 그녀는 자동차 사고로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것.  그때부터 특별한 그녀와 사귀기 위한 그의 특별한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그들의 호감은 하룻밤만 유효한 것이어서, 그는 다음 날이면 그녀에게 다시 작업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한두 번은 흥미진진한 일일 수는 있어도 항상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꽤 지난한 일이 된다.


매일 만나며 그녀와의 관계를 기억하는, 그래서 그만큼의 시간이 축적된 그. 하지만 그런 그와는 달리 그녀에게 그에 대한 기억은 단 하루만 유효하다. 그에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지만, 그녀에게 그는 호감 가는 사람 이상이 아니다. 그녀에게 그는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에게 그녀는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간다.   


피터 시걸, <첫 키스만 50번째>, 2004

매일 아침 초기화되는 그녀. 그에게 그녀는 점점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지만, 그녀는 그가 호감 가는 사람 이상은 아니다. 사랑하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시간과 기억의 터널이 있다. 그리고 그 터널을 건너기 위한 고군분투가 있어야 그제야 사랑은 시작된다.


그녀가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는 그녀의 아빠와 오빠는 사고 전날의 신문을 여러 부 제작해 놓고 여러 환경을 조작해 그녀를 현재라는 시간성에 가둔다. 어차피 하룻밤이면 지워질 기억이기에 그 하루만 똑같이 조작하면 그녀는 동일한 시공간성에 머무르게 된다. 때론 예상치 못한 사건(가령 주차위반 딱지를 발급받는 일 등)으로 루시가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되는 일도 종종 일어나지만 그것 역시 하룻밤만 잘 넘기고 나면 된다. 다음 날 다시 조작된 현재로 살아가면 되니 말이다. 과거의 시간성은 축적되지 않고 증발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에게 미래는 도래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와 사랑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가능할까. 그래서 그는 그녀의 기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들 관계에 일종의 역사성을 부여하는 셈인데, 그 수단으로 비디오테이프에 둘의 관계 등을 기록한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녀는 처음 몇 시간 동안 당황스러워 하지만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남은 하루를 살아간다. 이제 그녀는 현재라는 시간의 감옥에 갇히지는 않는다. 물론 그 자유 역시 하룻밤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의 장래를 막는 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에게 결국 이별을 선언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매번 사랑을 만들어 내는 일을 선택했다. 그녀에게는 그와의 키스가 언제나 첫 키스지만 그에게는 여러 번 경험한 ‘첫 키스’ 일뿐이다. 언제나 첫 번째 데이트인 그녀에게 그 감정과 느낌은 언제나 새로울 수 있어도 그에게도 반복되는 첫 데이트가 꼭 새롭고 신선한 무엇일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녀에게 결혼 후에도, 출산 후에도,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매일 아침 비디오테이프를 그녀의 머리맡에 놓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과거의 시간을 축적하는, 그래서 둘의 관계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방식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그들에게 미래를 도래하게 하는 한 방식인 셈이다. 과거를 저장했지만 그것은 미래를 조금씩 만들어 가는 그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과거가 저장된 비디오테이프를 그녀에게 남기는 일, 그러니까 매일 새롭게 과거를 쓰는 일과 미래를 만드는 일이 단지 그녀만을 위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일은 (그녀와 달리) 측두엽(側頭葉)이 망가지지 않은 그가 매번 그녀를 새롭게 사랑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하루하루 (마치 그녀처럼) '다시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행위이다.


피터 시걸, <첫 키스만 50번째>, 2004

사랑은 단 한 번 빠져든 어떤 감정이나 만남으로 완결되는 무엇이 아니다. '굿모닝, 루시'라는 헨리의 인사처럼, 차라리 사랑은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에서는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매번 반복되는 그 일이 그리 낭만적이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반복이 그렇듯 때론 지겹고 때론 시시하고 때론 도망가고 싶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망가진 측두엽과, 당신의 잃어버린 시간과, 우리의 추억과, 무엇보다 우리의 (그냥 주어지는 미래가 아니라) ‘도래할 미래’를 위해서라면 매일매일 사랑을 만들고 기록하고 저장하는 일이 꼭 시시하거나 지겨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절박함으로 사랑을 만들어 가는 일일 테다.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내가 게으르다면, 내가 끊임없는 각성과 주의와 활동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나는 사랑받는 사람과 능동적으로 관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자는 것만이 비활동에 적합한 상태다. 각성 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다.”
-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


우리는 종종, 그저 사랑의 ‘자연발생적인(본능적인) 힘’으로 우리의 사랑이 매일매일 기능/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연인과 싸우고 나서 때때로 ‘사랑은 너무 어려운 것 같아’라고 말하고는 한다. 하지만 사랑은 애초에 힘든 일이었다. (사랑이라는 동력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하고 깨어있는 사랑은 게으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당신과 나의 측두엽이 멀쩡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사랑을 잊/잃고 있었다.  




하여, 나는 차라리 당신의 건망증을 당신의 측두엽이 멀쩡하지 않은 증상으로 착각하리라. 그러면 매일 아침 초기화되는 당신이 내 곁에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도 매일 아침 초기값으로 설정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의 미래도 영원히 유예될 것이라면, 나는 매일 아침 깨어나 '미래'라는 '당신'과의 사랑을 다시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래된 미래를 만드는 일’, 그러니까 당신이라는 타자를 ‘사랑하는 일’은 르네 샤르의 문장처럼 '집요하게 애쓰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 것, 그리고 측두엽이 없는 정도의 절박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아는 셈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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