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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May 28. 2016

이별의 목록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데이비드 실즈의 저서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 적힌 바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은 어느 프랑스 여성인데 1997년에 죽을 때 122세였다고 한다. 보통은 (보통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딘가 어색하지만) 아무리 장수해도 115세의 벽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115’에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것인지 거의 모든 장수 노인들이 114세에 죽었다고 한다. 이 소식에 의하면 (현재까지) 우리는 어떤 방법을 써도 125년 이상 지구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따지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단축된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2011년 기준,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77.6세, 여성은 84.4세이다. 꽤 길다면 길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지나(내)온 시간을 생각하면 그 시간들이 그리 긴 시간만은 아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까지 그랬듯이 남은 시간들도 빨리 갈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확실해 ‘보이는’ 것도 그 보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리 보이고 또 달리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확실함, 진실, 진리는 사실 믿음의 차원이지 그것이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확실한 무엇은 아니다. 과학적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수학적 명제 또한 어떤 규약 속에서 확실한 것일 따름이지 그 규약이 흔들리면 수학적 명제도 흔들린다. 눈앞에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조차 확실한 것일까. 베이컨이 말했듯이 혹시 눈을 감으면 당신이라는 존재도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당신의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당신을 생각하는 ‘나’는 확실한 존재일까.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했지만 지젝은 오히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며 ‘코기토’는 현실적 개인의 ‘나’가 아닌 어떤 텅 빈 지점, 즉 주체는 공백이라고 말한다.


세계는 온통 불확실한 것들 투성이며, 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인류의 문명화란 사실 불확실성의 세계를 확실성으로 세계로 해석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었을지 모른다. 과학이 그러하고 역사학이 그러하고 철학이 그러하다. 어떤 법칙, 원리, 인과 등의 발견과 발명은 불확실한 것들이 산재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나름의 대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철학적, 과학적, 학문적 근거를 들거나 연구를 하지 않더라도 명확하게, 그리고 유일하게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확실한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 생물학적으로 죽는다는 사실 (이 사실도 물리학적 차원에서는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자로 이루어진 존재라면 원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운동하기 때문이다). 이 명제 앞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이것은 슬픔일까 위안일까. 아니면 슬픔이면서 위안일까.


알랭 레몽의 자전적 소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에 떠나온,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을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가 추억하는 어린 시절은 아름다웠다. 추위도 가난도 궁색함도 모두 아름다웠다. 많은 형제가 있었고 부모님이 계셨다. 좁지만 작은 집과 마당이 있었고 보잘 것 없는 마을이지만 남들은 모르는 비밀의 숲이 있었다. 명절이나, 타지에서 기숙학교에 다니던 형이 돌아오는 날 가족들이 둘러앉은 식탁엔 즐거운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소설 1부에서 그토록 즐겁고 아름다운 순간들에 대한 회상은 마치 우울하고 슬픈 2부를 위한 긴 하나의 수식이었을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번도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아버지는 폭력적인 사람이었던 것. 그런 아버지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동생마저 세상을 떠난다. 형제들도 모두 흩어지고 종내 아무도 남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집마저 팔린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나는 샤토브리앙이 쓴 그 유명한 《무덤 저 너머의 회상》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대목을 읽은 적이 있었다. (…) 나는 그의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었다. 나의 모든 하루하루는 작별의 나날이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 콩부르의 숲을 떠나야만 했을 때의 가슴을 찢는 듯한 아픔을 표현한 대목이었다. 왜 어린 시절부터 사람은 사랑하는 모든 것과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일까? 왜 모든 것들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일까? 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왜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과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언제나 이별하는 것일까. 이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할까. 그 이별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면 그곳엔 무엇이 적혀 있을까.


흐릿하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집과 그 동네, 자주 놀던 개울, 그 풍경들, 아이들 없는 운동장, 그곳에 내리던 노을,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전학 간 친구, 혹은 내가 전학 가며 헤어져야 했던 단짝 친구, 엄마 없던 집에서 항상 반겨주던 강아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한 친구,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그 편지들, 사랑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발화하게 했던 그 사람, 혹은 그 사랑, 낯선 도시 어느 골목에서 처음 만나고 그곳에서 헤어진 어떤 사람, 그때 찍은 한 장의 사진, 그때 내리던 비, 그때 불던 바람, 말이 없던 할아버지와 어린 나를 예뻐하던 할머니, 그 어린 시절의 나, 그때의 목소리, 그때의 소망, 그때의 슬픔, 그리고 언젠가 그 이별의 목록이 될 나 자신…  수많은 ‘흑백의 추억’들.   


얼마든지, 하루 종일 채워 내려갈 수 있는 이 목록들. 왜 우리는 이별하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일까. 차라리 사는 일은 이별하는 일일까. 오래 살수록 이별의 목록은 길어지고 그 슬픔도 커지는 것일까. 그것을 알기까지 꽤 에둘러 오랜 시간의 가장자리를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하여 그 나직하고, 그러면서도 좀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따라다녔다. 하마터면 수십 년 동안 참아온 울음을 퍽, 하고 터트릴 뻔했다.” - 김화영


이 소설의 번역가 김화영이 ‘퍽’하고 울음을 터트릴 뻔한 건, 이 소설이 대단히 슬프거나 특별한 슬픔을 말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 소설의 ‘나’처럼 하루하루 작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낯설지만 지당한 일을 우리에게 새삼 환기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눈을 마주할 수도, 손을 잡을 수도, 말을 건넬 수 없는 그 누군가를 환기하기 때문에 울음을 터트릴 뻔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제는 어제와 이별했고, 오늘은 처음 맞이한 오늘과 이별하고, 아마 내일도 내일과 이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별을 이별로 알지 못하며, 이 세상과의 만남이 언제나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삶을 어떤 경쟁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은 오늘도 이기기 위해 애쓰고 이겨서 기뻐한다. 하지만 그도 언젠가 결국 진다는 것을 모를까. 아니면 외면하는 것일까. 삶은 결국 지는 일이다. 세상을 승패로 갈리어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죽음’이라 불리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패배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약육강식, 자연도태란 과학적 허명을 쓰고 경쟁과 승패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예정된 패배 속에서 사는 셈이다. 하지만 삶이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라면, 죽음이 꼭 지는 것만은 아닐 테다. 그저 하루하루 작별을 하며 한두 개의 슬픔을 품고, 때론 그 슬픔을 한두 개씩 버리거나 잊으면서 살아가는 일일 테다.    


에드바르트 뭉크, <이별 Spertation1>, 1900.

남자의 어두운 얼굴만큼이나 그의 표정이 어둡다. 그런데 핏빛 가득한 손은 떠나는 그녀만큼 환하다. 날이 어두워지고 보랏빛 대지가 저물어간다. 긴 강물처럼 그녀도 흘러가듯 떠나간다. 흐르지 않는 강물이 없듯, 어두워지지 않는 하늘이 없듯, 그들은 오늘도 작별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수많은 이별 위에  또 하나의 목록을 적어 간다.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길게 에둘러 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건 무척 슬픈 일이지만 삶은 긴 이별의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신과 나는 이별했다는 것. 조금 빠르고 늦은 시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우린 모두 하루하루 작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 말을 통해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섣부른 위로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이별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늘도 우리는 많은 것과 이별하며 살고 있고 또 앞으로 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면, 그렇게라도 하면, 당신과의 이별이 조금은, 삶의 한 순간으로, 삶의 한 과정으로, 작별의 한 목록으로 적힐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당신의 이름, 당신의 존재, 당신의 냄새가 수많은 이별의 목록에 놓인 다면, 그렇게 놓인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오늘 나를 스쳐 떠나간 따스한 바람 아래의 목록에 당신을 적을 수 있다면, 이제 나는 아주 ‘잠깐 지구 위를 걷는 동물’로, 남은 시간 동안 다시 하루하루 이별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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