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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May 05. 2016

당신에 대한, 내 모든 두려움

질투라는 감정

질투(嫉妬). “부부 사이나 사랑하는 이성(異性) 사이에서 상대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경우에 지나치게 시기함.” - <국어사전>
질투(JALOUSIE).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는 감정. " - <리트레 사전>


국어사전에서 ‘질투’는 시기의 감정으로 설명하고 바르트의 책에서 재인용한 리트레 사전에서 ‘질투’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는 감정으로 설명한다. 두 설명 모두 타당하지만 ‘질투’라는 감정의 근원에 조금 더 가닿는 설명은 리트레 사전이다. 우리가 질투의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우선 시기의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그 시기의 감정이 가닿는 감정은 결국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고 함께 가지고자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가장 바라는 삶의 태도 중에 하나다. 세상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누고 함께 공유하는 평화로운 세상. 존 레넌도 ‘함께 나누는 세상을 상상’하며 노래를 불렀다. 한때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구의 6,70년대 비트 세대의 대항문화, 특히 히피문화에서 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사적 소유’에 대한 경계가 사랑의 영역까지 해당되었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유한다는 것은 탐욕적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누군가만 소유한다면 그것 역시 탐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성해방’을 지향했고 일부일처제와 같은 지배적 가치와 제도는 그들에게 극복되거나 거부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사랑(연정, 성애)’마저 함께 나누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꿈이었다.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 주인공 브뤼노는 이렇게 말한다.


성적인 욕망은 주로 젊은 육체를 지향한다. 따라서 성의 해방이 진전될수록 유혹의 장(場)에서 아주 젊은 여자들이 득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욕망의 진실로 회귀한 것일 뿐이다
“요컨대 성적인 공산주의는 존재한 적이 없었고, 단지 유혹 체계가 확대되었을 뿐이군요.”
“그런 셈이야... 유혹이야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거니까 그게 조금 확대되었다고 해방이라고 말할 수 없지.”
 - 미셸 우엘벡, <소립자>


볼품없는 외모와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그리고 어린 시절의 여러 상처로 인해 여성과 적극적으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브뤼노. 그는 사랑하기 위해 또 사랑받기 위해 애를 쓰지만 많은 사랑을 차지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브뤼노의 부모 세대, 특히 그의 어머니는 히피문화의 수혜 속에서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연애했지만, 막상 그 자유로움(해방)의 결과로 태어난 그녀의 자식, 주인공 브뤼노와 그의 동생은 버려졌고 자유롭지 못한 사랑을 했다(혹은 못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쥴 앤 짐, 1962.

쥴과 짐, 그리고 카트린의 사랑.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실패했다. 그 실패가 가치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사랑(연정)은 함께 나누거나 사랑(연정)의 연대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랑의 유토피아는 결국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것.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유토피아'란 말의 어원처럼 사랑과 성의 해방은 불가능한 해방이었고 우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랑하고, 질투하고, 두려워한다.


사랑과 성의 해방을 아무리 주장해도 결국 사랑과 성을 차지할 수 사람은 따로 있었던 것이라고 그는 냉소적으로 이야기한다. 젊고 예쁜 한때의 사람들에게만 사랑과 성은 해방되었던 것.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성은 여전히 불평등하고 소외되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연정)과 성을 공유(해방)하고자 했던 한때의 꿈은 정말 한때의 꿈이었다. 애초에 함께 나누기 힘든 것을 나누고자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독점하고 싶은 존재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사랑하고 싶은 대상이 아닌 것이다. 세상의 모든 독점 중 유일하게 타당한 독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독점이다.


하지만 독점에서 생기는 질투의 감정과 소유의 감정(태도)은 구분되어야 한다. 질투가 다른 사람이 내 연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그래서 연인이 나만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감정이라면, 소유에는 내 연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처분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오로지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수도 있고 상속할 수도 있다. 실제로 고대사회나 원시부족사회에서 부인을 증여하거나 상속했다. 가령, 어느 부족(몽골이나 알래스카 등)이 손님이 오면 아내를 잠자리의 선물로 제공한다는 이야기는 (광대하지만 적은 인구 분포를 가지는 지역에서) 근친혼을 막고 우성 유전자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진화론적인 태도거나, 가장 아끼는 물건을 상대에게 선물하는 어떤 경제적인 태도일 수는 있어도, 사랑이나 성 해방의 정신과는 무관한 태도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극대화된 소유의 표현이다. 그녀라는 존재가 단지 내 것, 내 사물이기에 선물할 수 있었던 것.


그러니까, 질투의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당한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소유의 감정으로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당신이 나만을 사랑하고 나만을 연정의 대상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당신을 사랑한다면 지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때 나는 불안하고 괴롭다. 하지만 소유의 감정에서 나타나는 태도와 질투의 감정에서 나타나는 태도는 사실 다르다. 소유에서 생기는 감정은 불안과 아픔보단 증오의 감정이다. 이 증오의 감정은 내 사적 소유물이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 불쾌감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가질 수 없는 소유물에게 화가 나고 종내 그 분노는 어떤 파국으로 치닫는다. 가끔 신문에 나오는 치정 사건은 사랑, 질투, 소유 등의 각기 다른 결을 섬세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Kokoschka Oskar, Lovers with Cat, 1917.

질투는 소유가 아니었던 것. 소유는 사랑도 아니었던 것. 소유란 무엇을 가질 수 있는 권리인 동시에 그것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도 함께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처분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고 증여할 수 있는가.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고 타인이라는 존재를 내 뜻대로 처분할 수 없다면, 애초에 소유는 사랑과 아무 관련 없는 무엇인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흔한 착각은 소유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렇다. 우리는 여태 소유와 질투를 혼동하고 있었던 거다. 당신은 단지 내 사적 소유물이기에 당신을 내 권한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것. 그래서 그녀가 만나는 사람을 제약하고 그녀의 귀가 시간을 제한하고 심지어 옷 입는 스타일, 헤어스타일, 말투까지도 제약/제한하거나 하고 싶었던 것.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소유의 욕망이었던 것. 그래서 마음대로 소유하지 못했을 때, 불쾌하고 짜증 나고 분노했던 것이다.


하지만, 질투는 분노나 시기와 다른 무엇이다. 질투는 리트레 사전의 정의처럼, 차라리 두려움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를 떠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두려움. 아무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두려움. 끝내 당신을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두려움, 하지만 당신이 나만을 사랑해주기 바라는 두려움. 그리고 이 질투의 감정마저 당신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두려움. 사실, 질투는 이렇게 섬세하고 소극적이고 연한 어떤 마음이고 태도였던 것.


그래서 질투에 빠지면 혼돈스럽다. 불편하고 초초하고 불안하고 힘들다. 당신에게 질투의 감정이 생긴다는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나는 당신이 다른 남성에게 건네는 작은 미소 하나에 가슴이 아프다. 당신이 다른 여성에게 베푸는 친절 때문에 당신이 밉다. 하지만 더 미운 건 그런 당신을 미워하는 나 자신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고 질투에 빠진 나는 여러 번 미워하고, 여러 번 괴로워하며, 여러 번 두려워한다. 질투는 결국 당신에 대한 내 모든 두려움이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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