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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Jan 13. 2016

사랑은 왜 아플까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이 만날 때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롤랑 바르트) 여기서 항상 문제는 시작된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또는 그렇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 물론 스탕달이 바르트보다 먼저  이야기했다.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일이다. 그를 위한 나의 크고 작은 번거로움들, 희생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단지 (다른 이유 없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까지 하는데”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사랑하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좀 더 솔직하게 내 안을 응시하고 대답한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마땅하다.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고 싶어서. 헌신적이고 이유 없이 행한 나의 사랑과 행동은, 사실 그만큼  사랑받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의 그러하듯, 사랑 또한 완벽하게 공정하고 호혜적이지 않다. 내가 주는 만큼 정확히 그가 내게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론 내 사랑이 그에게 남아 넘치는 것 같고, 그의 사랑은 내게 언제나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 같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녀의 사랑은 내게 가득 차 넘칠 것 같은데, 그녀는 내가 주는 사랑을 언제나  부족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를 위해서 그녀는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다. 아니, 어떻게든 시간을 낼 수 있다. 그가 “오늘 볼 까?”라고 갑자기 통보해 와도, 그녀는 다른 약속을 취소하고 그를 만난다. 기꺼이. 그는 그런 그녀가 좋지만, 점점 그런 그녀에게 긴장감이 없어진다. 언제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고 언제든 곁에 둘 수 있는 존재니까. 항상 곁에 있는 것은 욕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죽하면, 프루스트는 “상대의 매력보다도 ‘안 돼요, 오늘 저녁엔 시간이 없어요.’라는 식의 말들이 연애의 동기가 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고 했겠는가.       


결국, 주고받는 것에 따라 사랑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힘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 힘의 관계에서 (희한하게도) 내가 상대방에 무엇인가를 더 주지 않을 때, 상대보다 종종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내가 연락을 덜 하거나, 덜 표현하거나, 덜 선물하거나, 덜 못 만난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내게 연락을 더 하거나, 더 표현하건, 더 선물하거나, 더 만나자고 말한다. 물론 그 관계는 반대의 경우도 성립되며 꼭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완벽하게 동시적이고 호혜적인 사랑이나, 한쪽만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 가령, 그녀는 그를 사랑해서, 그리고 받지 않고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그에게 끊임없이 헌신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것이 가능할까. 그녀 헌신의 게이지가 차곡차곡 오른다는 것은 주는 만큼 받지 못하는 아쉬움이 커진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불만의 게이지도 조금씩 쌓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 역시 그저 좋던 그녀의 헌신적이고 아낌없는 사랑이 어느 순간 부담이 된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되니까. 사랑은 엄밀히 말하면 빚지는 일이다. 혹은 연체된 세금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녀는 각종 증빙서류를 들고 채권자가 되어 그에게 귀환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지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녀의 사랑이 때론 (조건 없이) 선뜻 자금을 빌려주는 대부회사처럼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폴 델보, Le Salut, 1938.

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당신에게 다가서는 나의 사랑. 내 감정도 내 마음도 모두 벗고 당신에게 다가가지만, 그럴수록 당신은 내게서 뒷걸음질 친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물러 서는 사랑의 역설.


마더 테레사의 사랑이 아닌 이상, 사랑은 일종의 빚이다. 주면 받아야 하고 받으면 줘야 하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받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계산을 하고 있다. 한없이 주면 한없이 받기만 하는 그가 밉고, 한없이 받으면 한없이 주는 그가 부담스럽다. 내가 다가서면 그녀는 물러나고 그녀가 다가오면 나는 물러난다. 이게 꼭 나쁜 일은 아니다. 팽팽하게 당겨지기만 하는 줄은 곧 끊어질 테니까. 수평이 된 시소는 (오르고 내리는 시소게임 본연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공허한 놀이가 될 테니까. 누르면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야 하고, 밀면 밀렸다 다시 튕겨 나와야 한다. 그게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속성이니까. 물론 속이 뻔히 보이는, 단지 자신의 지배적인 위치만을 고수하기 위한 밀당은 재미없고 식상하고 피곤하고, 때론 지루하다.      


하지만 진정한 밀당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사랑을 하면 우리도 한쪽은 밀고 한쪽은 당기고 누군가 내려가면 누군가는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그런 불균형 때문에, 사랑하면 우리는 어느 순간 아플 수밖에 없다. 사랑은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때론 승자가 패자가 되고 패자가 승자가 되기도 하며 즐거워하고 아파하는 게임. 움직임이 없는 줄다리기와 시소가 없듯 아픔이 없는 사랑도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아픔이 두려워서 애초에 줄을 잡지도 시소에 올라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아픔이 싫어서 잡은 줄을 놓기도 하고 시소에서 내려오기도 한다.  때로 우리는 균형 없는, 이 불평등한 일을 두려워하고 귀찮아하며 회피한다.    




사랑은 나의 균형과 너의 균형을 통해서 계획적으로 균형을 잡는 일이라기보다, 나의 불균형과 너의 불균형, 이 두 불균형이 만나 섬세하게 균형을 잡아가는 일이지 않을까. 이 말을 다르게 번역하면,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이 힘겹지만 섬세한 사랑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아픔을 이미 알지만, 그 아픔을 기꺼이 사랑하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는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눌렀는데 복구되지 않는 피부는 죽은 피부다. 당신의 구애를 튕기는 그 사람이 바로 살아 있다는 얘기다. - 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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