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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May 20. 2016

당신이라는 고유명사

- 당신이 꽃들이고, 꽃들이 당신이라면

예컨대 어떤 남자(여자)가 실연했을 때 그(녀)는 ‘여자(남자)는 또 얼마든지 있잖아’라고 위로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위로하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실연한 사람은 이 여자(남자)에게 실연당한 것이고 그것은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여자(남자)는 결코 여자(남자)라는 일반 개념(집합)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위로하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알고 있었다 해도 여전히 이렇게 위로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결국 이 여자(남자)를 단지 유(일반성) 속의 한 명으로 간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 가라타니 고진, <탐구 2>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우리가 슬픈 이유는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확히는 사랑하는 ‘그 사람’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했던 건 바로 ‘그 당신’이라는 고유명이었지, ‘여자’라는 일반명사나 집합 명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리에 카페에 식당에 서점에 사무실에 ‘여자’라는, 혹은 ‘남자’라는 일반명사는 무수히 많지만 ‘당신’이라는 고유명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여자는 얼마든지 있잖아’라는 위로는 사실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일반 명사 여자라는 말에 내가 좋아했던 ‘그 사람’은 사실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가 멀리 떠날 때, 괜찮아 친구는 또 사귀면 되잖아, 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친구’는 그 친구일 뿐이지 다른 누군가와 대체할 수 없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자식’을 잃은 누군가에게, 또 낳으면 되잖아, 라는 위로는 위로가 아닌 차라리 모독 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하는 ‘그 사람’과 헤어진 나는, '그 사람'과 이별한 것이지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상황에, 혹은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당신과 이별한 나는 ‘그 당신’을 보지 못하기에 그토록 슬픈 것이지, 단지 여자를,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일반 명사를 못 만나서 슬픈 게 아니다.


여기 고유명 ‘그’와 어떤 절대성 속에서 사랑을 한, 기이한 여자가 있다. 모니카 마론의 소설 <슬픈 짐승>의 주인공 ‘나’. 그녀는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근무하는 동독 출신 고생물학자다. 그녀는 통일 직후, 서독 출신 프란츠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열두 시 반이 되면 어김없이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그런 그를 거의 절대적으로 사랑한다. 기존에 그녀에게 존재했던, 가령 남편과 딸 등을 모두 잊고/잃고 프란츠와의 사랑에만 몰두하고 집착한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가버렸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프란츠라는 고유명사의 존재가 사라졌지만 그녀는 다른 고유명사를 만나는 대신, 오히려 그에 대한 기억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프란츠가 없었을 때 내가 누구였는지 이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 아니었는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 년 전 나는 프란츠의 연인이 아니었다.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으로는,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그렇게 자신 인생 전체의 의미를 프란츠라는 고유명사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정의 한 그녀는 프란츠와 헤어진 이후, 은행에 가거나 생필품을 사러 장을 보러 나갈 때를 제외하곤,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한다. 말하자면 ‘나’는 “끝나지 않는 중단 없는 사랑 이야기로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프란츠가 사라지자 도시도 의미를 잃었다. (...) 번호판을 제외하고는 프란츠의 차와 완전히 똑같은 자동차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차를 따라갔다. 물론 그것이 프란츠의 차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 그런데도 그 낯선 자동차가 위로를 주는 프란츠의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프란츠라는 매개가 없으면 나는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절대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슬픈 짐승이다. ‘그 이’라는 고유명사의 ‘매개’가 없이 그녀는 한 개체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종내, 그 안에서 그와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기로 결심한다.  


“사십 년 전이나 오십 년 전 그날 저녁, (...) 그 저녁을 그가 떠나간 이후로 꾸며내고 있다. 내 연인과 함께했던 다른 많은 밤들도 역시 모두 꾸며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녀가 소망하는 것은 (이미 떠난) 프란츠라는 고유명사를 현재의 시간 속에 한없이 붙잡고 싶은 것. 그런데, 그런 그녀의 소망은 사실 소설 마지막에 드러난 어떤 파국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독보적인’ 사랑이, 어떤 면에서 집착 같은 사랑이 현실에서 불가능할지라도, 혹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더라도 유의미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반명사 남자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 프란츠인 그와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의 개별성을 존중했다는 것에 있다.


철학과 역사는, 그리고 과학은 인류와 어떤 보편에 대해 이야기했지 개별적인 '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그것들은 위대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것들에 개별적인 나의 자리는 없었다. 누군가는 ‘문학’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며 문학은 죽었다거나 별 의미 없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만약 문학에 아직 어떤 의미가 있다면, 문학에는 통계학이나 사회학, 혹은 철학, 그리고 과학은 할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일반 명사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점이 아닐까. 그 이야기에는 단지 사랑에 빠져 고통받는 '사람 일반'이나 통계가 있는 게 아니라 '엠마'가 있고, '베르테르'가 있고, '서희'가 있고 ‘나’가 있고 '프란츠'가 있다. 사실 내가 살아가는 건, 한국인이나 국민이나 시민으로, 혹은 여자나 남자로 살아가기보다는 ‘나’로 살아가는 것인데 막상 그런 단독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마주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도 일반 명사 ‘사랑’이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인 우리의 사랑이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독창적인 무엇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마 가장 흔하고 익숙한, 가장 특별할 것 없는 사랑일 것이다. 만나면 차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영화 보고, 포옹하는 것. 하지만 내 앞에서 차를 마시는 당신은 유일한 당신이고 나와 포옹하는 당신은 일반명사에 포함되지 않는 바로 ‘그 당신’이다. 그래서 포옹의 순간 느껴지는 당신의 냄새는 다른 어떤 것에서 느낄 수 없는 단 하나의 유일한 감각이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봄, 1573.

아름다운 꽃잎과 식물들. 각각의 개체가 모였다. 단 하나도 대충 그려진 것은 없다. 아르침볼도는 식물, 꽃, 과일, 채소, 어류, 조류, 포유류, 심지어 책이나 술통 같은 개별적인 물건들로 어떤 사람, 그러니까 개별적인 어떤 존재를 그렸다(이 사람은 황제 막시밀리안 2세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는 그런 개별의 사물이 모여서 보편이나 일반, 또는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아름다운 꽃은 그 개별성을 지닌 채, 개별성을 지닌 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 철학자들이 유사 이래 논쟁해왔던 개별과 보편 논쟁을 무색하게 하는 그의 상상력. 개별이 개별이 되고 고유명사가 고유명사가 되는 것. 이 개별적인 사람은 여기서 어떤 집합이나 보편이 아닌 한 개체이면서 동시에 무수한 개체들이기도 한 것. 각각의 꽃들은 그 황제고, 그 황제는 각각의 꽃들인 셈. 우리의 사랑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떤 보편에 속박되지 않는, 일반명사의 사랑이 아니라, 일반명사의 당신이 아니라, 고유명사의 당신, 고유명사의 사랑. 당신이 꽃이고 꽃들이 당신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사랑이 일반명사 사랑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당신과 나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다. 모든 것이 상대(주의)적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라는 존재와 그 당신과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그 순간'(일반명사 ‘순간’이 아니라)은 다른 어떤 곳에도 다른 어떤 시간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하면 슬픈 것이다. 그런 어떤 절대성의 세계가 파괴된, 그런 절대성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슬픈 것이지, 단지 누군가와 헤어졌기 때문에 슬픈 것만은 아닌 것이다. 고유명사인 당신과의 이별은 원래 쉬운 일도 간편한 일도, 그럭저럭 때워지는 일이 아니었던 것. 만약 일반명사인 그녀를 사랑했다면 일반명사 이별도 그런대로 쉬운 일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과 헤어지면, 바르트의 말처럼 “나는 그 사람이 아픈”것이다. 누군가와 헤어졌다는 일반적 사실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그 사람이었기에 아픈 것이고 그것은 마치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듯 그 사람이 아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절대적인 세계가 또 다른 하나의 절대적인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진의 말처럼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결국 이 여자(남자)를 단지 유(類, 일반성) 속의 한 명으로” 꼭 간주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절대적인 세계를 떠났다는 것이, 다시 어떤 절대의 세계의 진입마저 차단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절대적인 존재와 절대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절대적인 사랑이란, 오로지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절대적인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절대적인 존재와만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헤어지고 다른 누군가와 다시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절대적인 사랑’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최소한 그렇게 하겠다는 어떤 다짐이고 노력이다. 언젠가 내가 '그 당신'과 '그 이별'을 하더라도 말이다. 당신이 꽃들이고 꽃들이 당신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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