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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Apr 08. 2016

사실은, 내게 지는 것

다툼의 태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어도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까.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때문에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를 테면, 그녀의 예민함과 섬세함 때문에 내가 힘들더라도,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의 과묵함과 냉정함 때문에 내가 힘들더라도,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도대체 사랑할 수 있을까. 다투지 않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다투는 것일까.     


만약 그와 내가 같다면, 같은 곳에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만 공유하고 같은 이해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아무 힘듦도 다툼도 없을 것이다. 힘듦도 없고 틈도 없고 갈라짐도 없고 비껴감도 없고 다툼도 없고, 완전한 동일성 속에서 우리는 함께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라면 아마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는 ‘차이’를 통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온통 하얀색만 존재한다면, 막상 우리는 하얀색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하얀색을 하얀색으로 인지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검은색이 있기 때문이다. 검은색이 있어야 우리 눈과 머리는 그제야 변별력을 가지고 흰색의 깨끗함과 순결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의미를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랑의 의미 역시 차이를 통해 생성되는 무엇이다. 당신과 나의 완전한 동일성 속에서는 어떤 의미도 어떤 사랑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 되기를 꿈꾸고 노래하는, (특히 초기) 연인의 소망은 불가능한 꿈이기도 하지만, 사실 사랑의 의미를 제거하는 불경한 꿈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아니고 나는 그가 아니다. 만약 전혀 다투지 않고 사랑한다면, 그건 ‘죽은 자에 대한 사랑’과 다를 바 없다. 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이 동일성의 자리에 위치하는 게 아니라면, 그와 나는 조금씩 비껴가고 그 틈에서 다툴 수밖에 없다. 가령, 누군가를 ‘예의 바르게 무시'하면 그와 다투지 않을 수 있다. 혹은 ‘절대적으로 군림'해도 다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예의 바른 무시나 절대적인 군림은 사랑이 아니다. 서로가 다른 욕망과 생각을 가진 타자고 그 타자성의 자리에서 우리가 만난 것이라면, 다툼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처럼 당연한 무엇이 된다.      


르네 마그리트, 골콩드, 1953.

중절모와 오버코트의 사내들. 모두 거의 비슷하다. 차이와 개성이 제거된 세상. 그들은 그저 빗방울처럼 동일성의 세상에 놓인다. 차이가 없다면 의미가 생성되지 않고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사랑도 할 수 없다. 당신과 나의 차이가 다툼의 원인 같지만, 사실은 사랑이 조건이었던 것. 그런 의미에서 차이와 다툼은 우리가 사랑하는 한, 온전히 우리의 것이고, 그것으로 동일성의 세상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다투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말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어떻게 다툴까’, 혹은 다툼 이후의 태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더 유의미한 일일지 모른다. 다투는 일이 어쩔 수 없다면, 아니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그리고 사랑하는 이상(헤어지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는 다툼의 태도와 다툰 후의 태도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일로 다투었든, 우리는 사랑한다면 다툼 자체를 외면하기보다, 다툼을 인정하고 다툼을 받아 들어야 한다. 다툼을 인정하는 건 차이를 인정하는 일이고 차이를 인정하는 일은 그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다. 다툼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때, 해결되지 않는 다툼이 어디 있을까.


진지함에 제거된 생활에서, 진지함이 어떤 놀림감마저 되어가는 삶에서, 우리가 진지 해지는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고 깊은 슬픔에 빠졌을 때다. 어쩌면 유일하게 진지한 시간은 슬플 때인지 모른다. 그래서 다툼과 슬픔이 단지 공허하고 소모적인 일만은 아니다. 다툼이 우리의 삶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어떤 성찰을 남겨 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와 다툰 나는, 그녀와 헤어짐으로써 이 다툼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면, 또 우리 사랑에서 다툼이 없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나는 매번 다투고, 나는 매번 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 차이는 차이로 남으며, 우리 사랑은 아직 사랑으로 남을 테고, 그렇게 새로운 사랑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 지는 것이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 -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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