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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Dec 22. 2015

당신은 나의 관객

사랑 중독, 또는 후천성 사랑 결핍 증후군

대부분의 것들은 중독 증세를 유발할 수 있다. 도박, 마약, 알코올, 니코틴과 같은 것은 물론이고 운동, 탄수화물, 게임, 스마트폰 등. 사랑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랑은 가치 있는 일이지만, 내가 왜 사랑에 빠지는가, 내가 왜 그를 사랑하는가, 혹은 왜 내가 그의 구애에 응답했는가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한다.   


누구나 한두 번쯤 했던 실수가 있다. 사랑 중독의 금단 증상인 불안, 우울, 외로움, 공허함 등으로 힘들어할 때, 금단 증상을 막아 줄 적당한 대상이 마침 나타나서, 나는 사랑 혹은 연애라는 가장된 연극을 하며 손쉬운 처방을 했던 일들 말이다. 주말 저녁에 혼자 다이어리나 끄적이는 일이 싫어서, (대개 여자는) 우선 자신의 공허한 감정을 채워줄 상대를, (대개 남자는) 우선 자신의 공허한 성적 충동을 채워줄 상대를 만난 것이었다. 물론 그러다가 ‘정’은 들었다. 하지만 만나면서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다.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할까. 심지어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날까,라는 의문.      


어떤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여백을 채우기 위한 만남은 쉽게 헤어진다. 그리고 공허함에 (비록 그것이 큰 상실감은 아닐지라도 상실은 상실이기에) 또 다른 공허함이 추가된다. 더 커진 공허함에 더 빨리, 더 급히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공허는 점점 커진다. 그러다 결국, 어떤 결론에 이른다. 나는 왜 이럴까.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결론에. 그리고 자기 책망에 빠진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물 속에서 스스로 허우적거린다.      


언젠가 어떤 여인을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 여인의 호감을 사기 위해 열심히 들어주었다(혹은 들어주는 척했다). 몇 번은 그럴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 도중 양념처럼, 말하자면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내 이야기도 물어봤다. 그리고 곧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넘어 갔다. 처음에는 호감 가는 사람이니깐, 웃으며 맞장구치며 들(어주)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점점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이 나를 만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자신의 연극에 필요한 관객을 모집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그녀라는 무대의 관객이었다. (물론 나도 관객을 연기한 또 다른 배우인 셈이다.)


알랭 드 보통이 자신의 소설에서 그랬던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상대에 대한 관심은 최대 15분을 넘지 못한다고. 실험해 봐도 좋다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15분 이상 듣고 있는 일에는 대단한 인내심이 요구된다(정말 실험해 보시라). 그런데, 종종 우리는 상대방에게 인내심 테스트를 하고 있다. 내 삶에 대해, 내 외로움에 대해, 내 아픔에 대해 말할 줄만 알지, 그의 삶에 대해, 그의 외로움에 대해, 그의 아픔에 대해 잘 들어 주지 않는다. 바디우의 말처럼 사랑은 ‘둘의 무대’이지 나의 외로움에 대해  독백하는 독무대가 아니다. 외딴 방에서 끊임없이 외로움을 일방적으로 타전하는 무선기사가 아니다.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 <무도회가 끝난 뒤.> 1899

무도회에 갔다 온 그녀. 그곳에서 모든 것을 소진한 듯 몸이 축 늘어져있다. 한 손엔 책을 들고 있지만 읽을 힘도 의지도 없다. 화려한 무대에서 소파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과 몸엔 어떤 무기력과 허탈함이 배어있다. 혹시 나는 그와 함께 '둘의 무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라는 독무대에서 여전히 주인공인 배우로만 서 있는 건 아닌지. 누군가와 헤어지고나서, 그러니깐 독무대였던 내 연극이 끝나고 허탈감과 상실감에 빠진 것은 아닌지.  


‘당신을 좋아해요(사랑해요)’라는 말로 그를 객석의 관객으로 앉히고, 우리는 내 사랑과 내 삶을 연기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린 대부분 후천성 사랑 결핍 증후군에 빠진 환자일지 모른다. 나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나와 그녀는 서로의 무대에서 각자의 관객만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시시한 연극이 끝나고 관객이 떠나간 후에 텅 빈 무대와 객석을 바라보며, 우리는 감상/감성에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 실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그의 말에 얼마나 귀 기울 수 있는지. 그것은 단지 무대의 배우 역할에서 객석의 관객 역할로 바꿔 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진정으로 내가 그가 하는 생각과 고민과 상상에 감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말이다. 그의 말에 겉돌고 있는 나를 발견하거나 심지어 따분해서 하품이 난다면, 나는 그동안 무대 위의 배우였고 그는 관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단지 나는 내 외로움을 채워줄 관객이었다.


'둘의 무대'에서 나는 그로 인해 얼마나 변화했는지, 또 그는 나로 인해 얼마나 변화했는지, 소비/소모적인(물질이건, 정신이건, 육체이건) 만남이 아니라 무엇인가 더 풍성해지는 만남은 아닌지, 내게 보이던 세상이 그녀를 통해 가려진 것이 아니라 내게 보이지 않던 세상이 그를 통해 보였는지, 그리고 나는 정말 그의 상상력에 공명하고 그녀의 기쁨과 슬픔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보았는지, '타인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을 했는지, 어떤 것이 둘의 무대인지 고민했던가.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여전히 무대에서 독백 중인 배우인지, 혹은 여전히 누군가의 관객인지. 하지만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모르는 것보단,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은 안다.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인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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