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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May 21. 2016

이해, 이야기, 그리고 사랑

하나의 문장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


터무니없단 걸 알면서도, 또 번번이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그리고 왜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는 걸까? -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어떻게 한 날, 한 시, 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그토록 집중하고 열광할 수 있을까. 인기 좋은 어떤 드라마 같은 경우엔 거리의 사람마저 거의 실종시킬 만큼,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티브이 앞에 가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야기가 뭐라고. 진짜 있었던 일도 아니고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나온 허구의 이야기가 도대체 뭐라고, 왜 사람들은 숨죽이고 그 인물에 대해 그 사건에 대해 그토록 이야기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그것을 단지 대중문화에 현혹된 대중이라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 하여튼 그것이 '어떤 이야기'였든 이야기의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야기는 나와 남을, 그리고 삶을 이해하는 한 방식이다. 우리에겐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무엇인가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다.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또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타인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듣고 본다. 또 내가 이해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란 이해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과 이해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이 모인 어떤 것인 셈이다. 이해하거나 이해받을 필요도 없는데 어떤 일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당신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사랑은 오로지 그것일지 모른다. 이해하고 싶어서 이해받고 싶어서, 우리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본다. 말로 다 채우지 못하는, 말로 다 번역하지 못하는 내 이해와 당신의 이해에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가 닿으려고  한다. 때론 반지나 구두로도 이해하고 이해받으려 하지만, 그것들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 포옹을 한다. 사랑은 어쩌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당신이 만드는 문장, 그 문장이 모여서 만들어진 이야기.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해하고 이해받고 사랑하는 것인지 모른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한아름. 조로증으로 세 살 무렵부터 늙어버린 17살 사내아이. 여든의 몸이 되어가는 그는 ‘더 큰 기적은 항상 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고,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이 기적’이라 생각하는 아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젊은 적이 없었던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과 병원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 그래서 자신의 외모만큼 부쩍 성숙한 사고를 가진 아이. 소년은 성금 모금 티브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을 계기로 어떤 소녀에게 메일을 받는다. 소년과 소녀가 주고받은 편지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아니, 너무 아름다워서 차라리 슬픈 이야기였다. 소년은 가족 외에 또래의 타인에게 최초의 이해를 받고, 또 이해를 하고 싶었다. 사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제 더 살 수도 없는데, 소년은 무섭게 자꾸 소녀를 이해하고 싶고 소녀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가슴 뛰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말하고, 그 애가 답하고, 다시 그애가 말하면 내가 답하는, 한 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고, 한 번의 호흡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하루. 딱히 뭐라 이름 부를 수 있는 사이는 아니라도, 그저 얘기를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게 좋았다. (...) 모든 것이 의미있고, 중요해지는 날들이었다. 그애가 하는 얘기, 그애가 쓰는 단어, 그애가 보낸 노래, 그애가 가른 여백, 그런 것이 전부 암시가 됐다. 나는 이 세계의 주석가가 되고, 번역가가 되고, 해석자가 되어 있었다."


이야기 속에서 소년은 최초의 사랑과 마주쳤다. 그래서 소년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탓에 너무 힘든 이 세상마저 덩달아 좋아져 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편지를 보낸 건,  단지 ‘이야기 거리’를 찾아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시나리오를 쓴다는 서른여섯 살의 아저씨였던 것. 그 사실을 알고 실망하고 낙담에 빠진 소년은, 어느 날, 소년은 사과하기 위해 몰래 찾아온 그 아저씨에게 (그 소녀의 이름인) “서하니?”라고 묻는다. 그가 서하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이야기를 꾸며낸 장본인이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는 소년은, 그래서 실망하고 분노하던 소년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에게, 아니 서하에게 말한다.


“전부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 다행이야. (....) 그래도 한 번쯤은 네게 이 얘기를 전하고 싶었어. 우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 직접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만날 수 없을 테지? 하지만 너와 나눈 편지 속에서, 네가 하는 말과 내가 했던 얘기 속에서, 나는 너를 봤어. (...) 그리고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있어주었던 것, 고마워.”


소년에게 온 편지는 정말 가짜이기만 한 편지일까. 정말 거짓이기만 한 이야기일까. 아니, 소년에게 진짜 혹은 가짜가 정작 어떤 의미나 있는 것일까. 만약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 편지 속에서, 그 이야기 속에서 소년은 최초이자 마지막 사랑을 했다는 것이 아닐까. 이제 곧 세상을 떠나야 하는, 곧 떠나는 이 세상마저 좋아져 버리게 만든 그 사건, 그 이야기. 그건 타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또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최초의 사랑이었던 것. 결국 이야기 속에서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정말로 있었다. 허구다, 가짜다, 진짜다, 진실이다가 중요한 게 아니였다. 모든 것이 다 가짜라 하더라도 ‘그 사랑’만큼은 '그 감정'만큼은 진짜 정말이었던 것. 그리고 소년은 보이지 않는 소녀를 보았다. 이 기적같은 일이 이야기를 통해 가능했다. 소년이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부모님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도, 공들여 쓴 엄마와 아빠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물론 그것은 소년 자신의 기원이 담긴 이야기로, 세상을 떠나는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Franz von Defregger,  Die Märchenerzählerin,  1871.

이해하는 일과 이해받는 일은 이야기하는 일의 다른 이름이다. 이야기는 사랑이다. 혹은 사랑이 이야기라도 해도 무방하다. 우리가 이야기의 매혹에 빠지는 것은 사실, 이해받고 싶어서, 또 이해하고 싶어서 일지 모른다. 그리고 끝내,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이해하거나 혹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이해하려는 태도는 어쩌면 사랑의 전부일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 단 한 문장. 아침에 온 그 한 문장으로 우리는 하루가 신비롭게 행복하고, 그 한 문장으로 어떤 슬픔도 버티고, 그 한 문장으로 아무리 피곤해도 잠 못 이루고, 그 한 문장으로 다른 어떤 슬픔보다 더 슬퍼한다. 한 문장 안에 담긴 그를 이해하고 싶고, 한 문장 안에 담긴 나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작게 쓰인 노란 숫자 1이 지워지지 않는 휴대폰을 보는 일이 힘든 이유는, 그에게 내가 보낸 문장이 이해되지도 이해받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문장을 보내는 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문장을 이해받는 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내 손을 떠난 그 문장, 다시 회수할 수 없는 그 문장, 이해되거나 이해받지 못한 문장은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우두커니 작은 여백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몇 시간을 기다린, 며칠 동안 기다린, 혹은 수신을 포기했던 그의 이해가 문장이 되어 내게 도착했을 때, 가슴이 멈칫하지만, 굳이 그에게도 작은 숫자 1을 남기고 싶어 그의 문장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잠시 덮어둔다. 그리고 이해를 미룬다. 이해하고 싶지만 그가 나를 이해하는 만큼 이해하기 위해 이해를 참는다. 나도 당신만큼 조급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도 당신만큼 여유가 있다는 것을 시위하며, 이 시간을 버티지만, 그것조차 얼마 가지 못한다. 어느새 그가 보내온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나는, 나는 단지 그를 이해하고 싶다. 그에게 이해받고 싶다. 그리고 그 이해를 통해 이야기를 하고 또 사랑하고 싶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야기를 만드는 건 사랑하기 위해서고, 사랑하는 건 이야기 하기 위해서다. 만약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즈음 우리의 사랑도 끝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종내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자꾸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용기를 내어 푸른빛을 발하는 휴대폰의 여백에 짧은 문장을 쓴다. 작은 숫자 1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면서,  이제 막 시작되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일단 첫문장을 써야 해, 첫문장을...... 그런 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두고 보자고.’ - 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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